바실리 칸딘스키, ’동심원들과 정사각형들‘
눈앞에는 캔버스가 아닌, 12개의 작은 사각형이 가지런히 놓인 종이가 펼쳐져 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형상을 모방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소리를 듣고, 색채의 영혼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지금 12개의 작은 우주를 창조하는 중이다. 이 우주들은 정적인 사각형 안에 움틀거리는 생명체, 즉 ‘동심원(同心圓)’을 품고 있다. 선은 더 이상 경계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음악의 선율처럼, 한 점에서 시작해 두둥실 퍼져나가는 울림이다.
먼저 중앙의 점을 찍고, 붓을 빙글빙글 돌려 첫 번째 원을 그린다. 이 원은 쿵하고 떨어진 돌멩이가 수면에 일으킨 잔물결 같다. 다음 원을 그릴 때는 이전 원과 슬쩍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간격을 둔다.
빨강이 터져 나올 때, 그것은 웅장한 트럼펫 소리처럼 꽝하고 앞으로 돌진한다. 그 옆에 파랑을 두면, 파랑은 쉬이익하고 뒤로 물러나며 깊고 고요한 명상의 공간을 만든다. 이 원들은 서로 주고받는 대화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때로는 작은 원이 조롱조롱 뭉쳐서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기도 하고, 어떤 사각형에서는 왈츠를 추듯 흐느적거리며 춤춘다. 이 모든 움직임은 내가 지휘하는 리듬이다. 점, 선, 면이 철썩 붙었다가 스르륵 분리되면서, 캔버스 위에는 두근두근 뛰는 심장 박동 같은 율동감이 넘실댄다.
바실리 칸딘스키, ’동심원들과 정사각형들‘ 1913
이 작품의 핵심은 색채의 마찰이다. 물감을 주르륵 짜내어 물에 풀면, 색들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노란색은 가장 밝은 영혼의 기운으로, 쨍하고 빛을 발하며 주변을 환하게 감싸 안는다. 그를 둘러싼 보라색은 묵직한 무게감으로 스멀스멀 노랑을 붙잡아 두려고 한다.
물감이 마르기 전, 젖은 물감 위에 다른 색을 톡하고 떨어뜨리면, 색은 서로에게 살짝 스며들며 은은하게 번진다. 한 칸에서는 붉은 열정이 활활 타오르는 듯하더니, 옆 칸에서는 차가운 초록색이 싸늘하게 열기를 식힌다. 색들은 칠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섞이고 번져나가며 흐물흐물 경계를 허문다.
이 동심원들은 영혼의 진동을 시각화한 것이다. 색을 배열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색채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가 캔버스 위에서 차르르 울려 퍼지게 한다. 이 사각형들은 각기 다른 감정을 담은 음표이며, 12개의 칸이 모여 하나의 장대한 교향곡을 완성한다. 마치 양자 세계의 입자들이 그러하듯, 이 색채들은 서로 양자 얽힘 상태에 놓여 있다. 하나의 색이 변하면, 멀리 떨어진 다른 색의 감정 또한 즉각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각 원은 고유한 색을 띠면서도 동시에 수많은 가능성의 색을 중첩된 상태로 품고 있다.
붓을 들어 어떤 색을 선택하는 순간, 비로소 그 중첩된 상태가 확정되어 캔버스 위에 찬란하게 드러난다. 나의 붓질은 곧 관측 행위이며, 무한한 색채의 가능성 속에서 하나의 현실을 톡 하고 끄집어내는 작업이다.
바실리 칸딘스키의 관점에서 그림 읽어 가기
러시아 출신의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는 러시아, 독일 (뮌헨의 청기사파 활동 및 바우하우스 교수 역임), 그리고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그의 대표작으로는 초기 추상화인 《구성 VII (Composition VII)》와 기하학적 추상화인 《구성 VIII (Composition VIII)》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