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에서의 죽음(1971) 리뷰
이상(理想)은 부정되는가 (가장 아름다운 소년이 나오는 영화)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가장 아름다운 소년에 소개된 그 유명한 비에른 안데르센이 나온 작품이며 독일의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인 토마스 만의 동명 원작 소설에서 영감을 받았다. 나는 원작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영화의 내용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아 이 영화를 문학적 관점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 자체로서 다뤄보기로 하였다.
영화의 시작은 활기 넘치는 선실에서 시작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주인공은 병약하고 근심에 가득찬 듯이 보인다. 배에서 내려 곤돌라를 타고 리도로 가는 길에 오지랖 넓은 노잡이는 증기선을 타려는 주인공의 말은 능글맞게 넘겨버리고 짐을 증기선에는 실지 못한다는 친절한 조언과 함께 자신이 직접 리도로 데려다준다. 그런 상황에서 주인공은 매우 불안해했지만 오히려 공짜로 배를 탄 셈이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목적지에 도착 못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구스타프 아센바흐는 음대 교수다. 그는 심장병을 치료하러 휴양을 위해 베네치아에 온 참이다. 그가 호텔의 숙소에 들어가기까지 쉴새없이 떠드는 이탈리아인들과 그들의 여유로운 모습은 시간엄수를 중요하게 여기는 독일인의 성향과는 천지차이다. 이 영화를 볼 때 이탈리아인들에게 불편함을 느꼈다면 당신은 유쾌한 성격은 아닐 것이다. 그의 친구 알프레드가 호텔에 병문안을 왔을 때 피아노를 쳐주자 구스타프는 때마침 호텔 책상에 놓여있던 모래시계를 보고 아버지의 모래시계를 떠올린다.그 모래시계의 구멍은 너무 작아 위쪽 모래가 전혀 줄어들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줄어든 것이 보일 때는 위쪽이 완전히 비는 마지막 순간이다. 이런 생각은 죽음 앞에서 그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 상당히 초조함을 느낀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가 식사를 하러 갔을 때 어떤 아름다운 소년을 보고 그에 감탄하여 예전에 자신의 친구인 알프레드와 한 대화를 떠올린다. 알프레드는 아름다움의 정신적인 개념을 부정한다고 주장한다. 예술가가 정신으로부터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것을 부정한다. 아름다움은 노력의 결과가 아닌 자연스러운 재능의 결과라고 말이다.
그러나 구스타프는 현실은 오직 우리를 유혹하고 타락시킬 뿐이라고 반박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예술가들이 어둠 속에서 활을 겨누는 사냥꾼이라고 느껴져. 표적이 무엇인지도, 맞췄는지도 알지 못해. 현실은 그 표적을 밝혀주고 명중시키는 것을 돕지 못한대 미와 순수의 창조는 정신적인 행위야." 알프레드는 화음을 예를 들며 이를 반박한다. 수학적인 조화로 이루어진 화음들은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이처럼 예술은 모호한 것이고 그 모호함이 발전해 과학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스타프는 기억 속에서 끝까지 알프레드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베네치아에 전염병 공고가 돌고 콜레라가 유행한다는 소문이 나자 구스타프는 짐을 싸고 다시 뮌헨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짐을 여행사에서 돌려받지 못한 바람에 다시 리도에 머물게 된다. 그러다가 자신이 계속 매혹되던 대상인 미소년 타지오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게 되고 그에게 집착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짐을 돌려받아도 계속 베네치아에 머물게 된다. 결국 자신의 욕정을 참지 못한 구스타프는 소년을 추행하게 되고 사람들에게서 경멸을 받는다. 심지어 친구인 알프레드조차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야말로 자네의 음악을 무덤까지 가져갈 때야. 순수의 선물은 자네처럼 늙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일프레드는 이 일로 충격을 받고 다음날 해변에서 타지오가 노는 모습을 보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영화에 나오는 친구 알프레드는 원작 소설에는 나오는 인물이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그가 있기에 구스타프의 이상에 대한 주제, 토마스 만이 늘 고민했던 이상적 예술성에 대해 첨예한 대립이 가능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분위기가 극적으로 치닫는 속에서 알프레드의 승리로 영화가 끝나게 된다. 디오니소스가 아폴론을 이긴 것이다.
하지만 사실 나는 영화의 결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구스타프가 오히려 불쌍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소재로 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인간의 이상이란 것이 단순히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으로 부정당해도 되는 것인가? 인간이 스스로와 치열하게 싸워오며 쟁취해 온 것들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상의, 아름다움의 산물들이 노력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며 정신적 고뇌를 거치지 않은 것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은 한 없이 변덕스럽고 제자리에 있을 줄 모르지만 예술은 불멸한다. 여기서 관념을 상징하는 구스타프는 우울하고 진지하게 나오고 현실을 상징하는 이탈리아인들은 밝고 유쾌하다. 하지만 실은 반대다. 이탈리아인들이야말로 관념의 상징이고 나약함에 중독된 구스타프야말로 현실의 상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