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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시헌 Aug 17. 2024

희랍어 시간_ 한강 리뷰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언어를 잃었다.어렸을 적부터 언어에 매혹되었으나 언제부터인가, 그것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입을 열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이 소름끼칠만큼 분명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p.15)"  아니, 정확하게는 자신의 언어가 투명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열입곱살 때 온 언어장애는 안 그래도 조용한 성격이었던 그녀를 더욱 사회에서 겉돌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고등학교 불어 시간에 언어 장애에서 벗어난 것은 그녀에게 놀라온 경험이었다.

그래서 지금 낯선 외국어인 불어가 침묵을 깨뜨린 경험처럼 희랍어를 배워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로 언어장애를 극복해보겠다는 심산으로 그녀는 아카데미에 와있다. 아카데미에서도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전남편과의 양육권 소송에서 패하고 팔년 전에 낳은 아이와 떨어진 채 있는 그녀는 흐르지도 않는 눈물을 닦는다. 메말라버린 정신 속에 진정한 감정이 들어설 공간은 없는 것일까.


   그는 열다섯살이 되던 해에 보르헤스의 대중강연을 엮은 책을 샀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그는 독일로 떠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독일의 한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목가구를 제작하는 일을 하였는데 어릴 적에 사고를 당해 청력을 잃었다고 한다. 하지만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그는 그녀에게서 큰 분노를 사고 결국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지금 그는 한국에 돌아와 독일에서 딴 희랍어 학위를 이용해 돈을 벌어 살고 있다. 공허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그 역시 보르헤스의 강연집에 적은 자신의 메모에 대한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보르헤스:세상은 환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메모:그 꿈이 어떻게 이렇게 생생한가? 피가 흐르고 뜨거운 눈물이 솟는가?'


   그녀가 듣는 희랍어 수업에서 그는 고대 그리스어와 같은 고어는 원시적 언어에서부터 발전하여 고도로 복잡하고 정교한 언어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가 몰락해가는 동시에 고대 그리스어 또한 타락하며(어떤 의미로는 진보하여) 그 형태가 단순해져 지금의 유럽의 언어들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마치 그녀가 언어에 가지는 감정적 밀도와 같다. 언어에 대한 열정이 고조되면 공포가 되고 그 공포는 언어를 다시 말소시킨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 그녀의 의식도 메말라간다.


   그가 할 수 있는 언어는 독일어와 한국어와 독일어 수화다. 그가 외국어를 배운 이유는 낯선 존재들에게 그토록 아름다운 존재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수단이다. 그러나 희랍어를 가르치는 그의 눈은 멀어가고 있다. 그의 시각이 완전히 사라지면 그에게 남는 언어는 누군가의 목소리나 기척일 뿐이다. 그가 더이상 무엇인가를 꿈꾸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눈물을 흘린다.


  어느 날, 그는 창문에 머리를 부딪히려는 새를 구해주려다가  안경이 깨진 채로 아카데미의 층계에 넘어지게 된다. 그를 발견한 것은 언어를 잃어버린 여자였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언어를 잃어버린 여자가 조우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그를 병원에 데려다주었고 안경점에 가서 아침이 오기까지 같이 기다려주기로 한다. 그리고 남자는 긴 독백을 하기 시작한다. 독일에서 살던 이야기. 매번 인정투쟁을 하던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말을 할 수 없는 그녀는 속으로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잠에 든 남자는 기독교 신자였던 독일의 옛 여자에게 신의 부재에 관한 논증을 보냈을 때 들었던 말을 다시 듣는다. "내가 말했지, 언젠가 네가 성립불가능한 오류가 될 거라고." 그러나 눈을 뜬 지금 그처럼 언어를 잃은 성립불가능한 오류인 여자가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 이 극적인 상황에 고양이 된 그는 그녀에게 입맞춤을 했고 그녀는 그에게 입맞춤을 받으며 언어를 되찾았다.


  그가 가르친 희랍어 수업시간에서 "중간태"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능동태와 수동태의 제 3의 형태가 희랍어에는 있다고 말이다. 예컨대 사랑하다의 중간태는 무엇인가를 사랑해서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주체의 행동이 동시에 객체로부터의 수동이 되는 것이다. 언어도 이와 같다. 내 생각에 언어는 존재의 밝힘, 존재의 드러냄이다. 언어는 소통, 즉 관계가 성립하지 않으면 쓰일 수 없다. 그러니 언어를 통해 존재한다는 것은 언어를 말하는 내가 동시에 말하는 사람에게 인식이 되는 과정이자 결과인 셈이다.


  여자가 언어 장애를 앓은 것도 존재하는 것 그 자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고, 남자가 눈이 멀어가는 자신의 삶을 괴로워했던 이유도 자신이 더이상 다른 사람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만일 존재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랑 그 존재를 온전히 인식할 수 없는 사람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 자신을 어렵사리 바라보는 절박한 시선을 보고 그녀는 용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 시력을 잃어가던 남자도 용기를 낸 여자를 통해 세상을 느낄 수 있으리라.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언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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