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터슨>으로부터
영화감독 짐 자무쉬가 만든 영화 <패터슨>에서 나도 모르게 배불러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루의 여정을 마친 주인공 패터슨이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내가 주인공을 반갑게 맞이하며 직접 만든 파이를 내어줍니다. 예술가 기질이 풍부한 아내는 오늘 음식도 창의적으로 만들어봤습니다. 배가 고팠던 패터슨은 고마운 마음으로 처음 먹어보는 그 음식을 입에 넣습니다.
하지만 관객은 음식이 주인공 입맛에 안 맞는 걸 단번에 알아차립니다. 귀여운 긴장감에 휩싸여 주인공이 어떻게 반응할지 집중하게 되죠. 패터슨은 맛이 괜찮다며 목에 넘기는 걸 선택합니다. 아내가 걸어오는 대화에 열심히 리액션을 보이며 꾸역꾸역 넘기려니 목이 막혀 물에 도움을 청합니다. 그렇게 파이 한 입당 물 한 컵과 함께 열심히 비워갑니다.
일상에서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맛없는 음식을 먹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돈 주고 가는 식당에서 먹었느냐, 아는 사람이 해주었냐에 따라 다르겠죠.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 해준 음식인 경우엔 무척 난감합니다. 나만을 타겟으로 한 정성이 담겼다는 것을 알기에 반응을 어떻게 할지 신중해집니다. 연애 테스트 항목 중 ‘연인이 해준 음식이 맛이 없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는 단골 질문인 만큼 꽤 중요한 사안입니다. 최근의 ‘깻잎 논쟁’을 포함해서 이런 문제는 사실 정확한 답은 없고 이것저것 요소들이 미묘하게 섞인 뉘앙스가 중요하죠.
이때까지 접한 뉘앙스 중에는 <패터슨>의 그 뉘앙스를 좋아합니다. 물 한 컵으로 애써 맛을 지워보며 꾸역꾸역 먹는 모습이 사랑하는 이의 서투름, 부족함, 다름을 소화해 내고야 말겠다는 귀여운 사투로 다가오기 때문이죠. 분명 패터슨은 파이를 남기지 않았을 겁니다.
<패터슨>의 장면을 떠올리면 아주 개인적인 기억 하나가 함께 떠오릅니다. 그때는 저의 역할이 패터슨의 아내였습니다. 계기는 모르겠으나 갑자기 된장찌개에 도전해보고 싶었고, 네이버 블로그의 레시피를 어설프게 따라 해서 끓였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해도 영 맛이 나지 않았고 된장 향이 나는 국으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때는 백종원 선생님이 대중에게 나서서 요리를 알려주기 전이라 백쌤 레시피였다면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헛된 자기 위로를 해봅니다.)
그때 그 안타까운 요리를 시식하게 된 사람은 아빠였습니다. <패터슨>의 패터슨이셨네요. 아빠는 원체 표현을 안 하는 분이지만 딸이 처음 요리한 된장찌개라서 그런지 약간 상기되어 식탁에 자리했습니다. 약간 상기된 모습에 벌써 미안해지는 마음이었습니다. 식사 전에 밍밍하다는 경고는 절대 빼먹지 않았는데 그건 딸로서의 마지막 예의였습니다. 아빠는 된장 향 나는 물을 한 수저 뜨고선 쩝쩝쩝 입맛을 다시더니 무심하게 한줄평을 남겼습니다.
건강한 맛이네. 좋다.
저희 가족 구성원이라면 고난도 추리력을 지녀야 합니다. 직접적인 애정표현을 지양하는 표현의 불모지 속에서 사랑의 단서를 열심히 추적해 나가야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죠. 참고로 난이도가 굉장히 높답니다. 그런 와중에 명동 한복판에서 외치는 ‘보라야. 사랑해!!!!’와 같은 직접적인 표현만큼이나 맞먹는 순간이 바로 몇 년 전 된장 향 나는 물의 한줄평이었던 거죠. 어설픈 저의 요리 실력이 아빠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해 주어 이상하게 웃긴 순간이었습니다. '좋다'는 말과 깨끗이 비어진 밥그릇은 현재도 어색하고 불편한 아빠가 저에게 보여준 확실한 사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된장 향 나는 그 물, 정말 맛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