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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익국어 Apr 04. 2022

동반자가 되고 싶다.

나는 왜 '국어' 교사를 지망하는가?

4월이 되었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유독 내게만 길게 느껴지던 국방의 의무를 끝냈고, 나는 코로나에 확진되어 격리 중이다. 기왕 확진될 거였으면 복무 중에 감염될걸 하는 후회도 잠깐 뿐, 혼자 방안에 있는 시간이 퍽 나쁘지 않았다. 하필 감금의 기간 동안 봄꽃이 피고 날씨가 좋은 건 좀 야속하긴 했다. 


코로나 증상은 인후통밖에 없었기에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 심리가 본래 간사한 것인지, 공부만 하려고 하면 목이 따끔거리는 게 상당히 거슬렸다. 아픈데 공부를 해야 하나? 이번 일주일 한다고 뭐가 바뀌나? 지난주에 교육심리학에서 방어기제를 공부해 뒀는데, 정확히 거기에 서술된 그대로 나의 마음이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브런치를 켜고 모니터 앞에 앉았다. 내가 이 지긋지긋한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내가 국어 교사를 지망하는 이유를 잠시 고민할 필요성을 느꼈다.


'교사'를 지망하는 이유는 진부할 정도로 뻔한 내용이다. 초등학교 6년간 날 지도했던 선생님들 모두가 참 좋은 분들이셨다. 그들은 내 동경의 대상이었고, 그들의 강렬한 이미지가 남은 6년의 중등교육 시절까지도 내게 영향을 미쳤다. 그렇게 난 초등 교사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어 왔었다. 


위의 '뻔한 내용'에서는 '국어'가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수많은 교사 중 '국어' 교사인가.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목은 수학이었다. 말을 비틀면, 나는 국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말과 글이 특별히 탁월하지도 않았고, 문학 작품을 보고 감동받은 적도 없었다. 고백하자면, 6년의 중등교육 기간 중 좋았다고 기억되는 국어 교사는 딱 두 분밖에 없다. 


하지만 여느 고3이 그렇듯 수능 성적 및 대학 원서 접수는 내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대학 노-트를 끼고 / 늙은 교수의 국어교육학개론 강의를 들으러 가'게 되었다. 수업은 혼미했다. 교과서 대표 저자이자 현대시 교육 연구의 선구자라고 칭송받던 대학자의 강의였기에 더더욱 당혹스러웠다.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 학년이 올라도 마찬가지였다. 쌓여 가는 것은 이수 학점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교생에 나갔고, 학부 수업 발표를 했으며, 졸업장을 받았다. 


그래서 임용시험 공부가 초반에 유독 힘들었다. 어쨌건 교사는 학생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부담의 무게를 배가시켰다. X작품의 해석 p를 꾸역꾸역 공부하면 다른 책에서는 X를 q로 해석한다. 문법 현상 Y를 공부해 두면 어김없이 Y에 배치되는 반례가 최소 1개는 존재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국어국문학 논문을 암기하지 않고서는 이 교과를 마스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일한 장기였던 '입 털기', 즉 학생들 앞에 서서 아무 말이나 하는 것조차 자신이 없어질 지경이었다. 내가 뭐라고, 난 이렇게나 모르는데, 너희와 수준 차이가 별반 나지도 않는데. 내가 과연 학생들 앞에서 교사로 서 있어도 될까 하는 심적 무게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무게감의 상당 부분은 일종의 죄책감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교생이 되었든, 교육봉사가 되었든, 과외나 학원 수업이 되었든, 나는 어쨌건 '교사'로 서 있어야만 했었다. 그 무게감과 타협하기 위한 나의 비겁함은 다음과 같은 말버릇을 낳았다.


너 말이 맞아.


그 밖에도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있다. 선생님이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인데 대단해. 선생님은 몰랐던 부분이네. 너 말이 내 말보다 더 좋은 견해인 것 같은데? 잘 모르는 걸 마치 아는 것처럼 포장하는 일은 죽어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그냥 인정했다. 너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선생님이 공부에는 퍽 자신이 없는데, 그래도 듣는 거 하나는 자신 있거든. 


흥미롭게도 현행 국어과 교육과정의 핵심을 관통하는 트렌드는, 내 생각에는 '너 말이 맞아.' 인 것 같다. '모범문을 모방하는' 작문 수업, '텍스트의 고정된 의미를 해독하는' 독서 수업, '정전의 모범적 해석'만을 강조하는 문학 수업은 낡은 것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이제는 학생이 무엇을 쓰든, 무엇을 어떻게 읽어내든, 타당하고 합리적이기만 하다면 그것을 존중하는 것이 우리 교육과정의 기본적 입장이다. 


여기까지 공부를 하고 나니 비로소 마음의 무게감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다. 모든 문학 작품의 모든 개별적 해석을 다 외울 필요도 없다. 논문에서 뭐라고 하는지가 무슨 상관인가. 내 앞의 이 학생의 견해가 나한테도, 이 학생에게도 훨씬 더 중요하고 빛날 텐데 말이다. 이제 약간은 떳떳하게, 그리고 더욱 진심을 담아 '너 말이 맞아.' 라고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교과에는 이와 같은 입장을 완벽히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분명 어떤 교과는 교사가 전문성을 바탕으로 학생보다 먼저 나아가는[先] 존재[生]여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국어는 꼭 그럴 필요가 없다. 교사가 된 나는 굳이 학생들보다 먼저 나아가지 않고(못-부정을 쓰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학생과 같이 나아가는 존재였으면 좋겠다. 교사와 학생이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로, 둘 다 맞을 수도 있고 둘 다 틀릴 수도 있지만, 우리의 대화를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함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존재였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나는 '국어' 교사를 지망한다. 학생들보다 앞서 나가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나 또한 함께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참 좋아하는 시, 최승자 시인의 <올 여름의 인생 공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이 작품을 감상할 때면 나는 항상 마지막 행에서 울림을 받는다. 그냥 '아이처럼'이 아닌,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으라'고 말하는 시인의 당부에서 '함께'의 가치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최승자 시인의 당부는, 미래에 교사가 된 내게 남기는 당부일지도 모르겠다. 앞서나가는 것보다 함께 나아가는 것을 생각할 것, '내 말이 맞아'보다 '우리 둘 다 맞아'를 생각할 것, 그리고 함께 웃을 것.


그런데 그건 일단 국어 교사가 되긴 되어야 생각...할 수 있는 거 아닐까? 브런치 끄고 한국어문법총론이나 마저 읽어야겠다. 글 쓰는 동안에는 신기하게 인후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작문의 치유적 효과(물론 좀 다른 의미의 치유겠지만)를 경험했다고 볼 수 있으려나 싶다. 내일의 나야 공부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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