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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점선 Sep 26. 2024

아버지의 유산

두 칸 초가집에 레코드판이 돌았네

 44년 전 첫 월급으로 월급보다도 비싼 가격의 정음사 출판인 “세계 클래식 전집”을 구입했다. 

 클래식 해설서가 딸린 CD전집이었다. 친정에 두고 와서 지금 없어졌지만 클래식 해설서는 결혼 할때 한 권 만 가지고 왔다. 10여년 뒤 웅진출판사의 “INTERNASIONAL PASPORT”라는 세계 민속 음악 전집을 샀다. 세계 민속 음악은 소장하고 있다. 아이들이 타지로 다 떠난 후 오래 읽어 너들너들 해 진 웅진 출판사의 “과학 앨범”이라는 책 등을 합쳐서 50권짜리 세계민화 전집으로 교환했다. 아무래도 나는 신화나 설화, 옛 이야기를 좋아하는 소녀였나 보다. 이런 면은 아무래도 친정아버지 피를 이어받은 덕분인 것 같다. 낭만주의자셨다. 60년대에 집에 레코드가 있었다. 눈에 선한 레코드 꽂이와 책꽂이에 꽂혀있던 70년대의 정음사 세계 문학 전집이 내게는 문학적 분위기였다. 레코드에서는 당시 가요가 들어있었고 나보다 5살 많던 고모가 많이 들었다. 나는 태어나 듣기를 판단하면서부터 가요를 들었지만 학교 교육에서 가곡과 클래식을 만난 후에는 클래식을 좋아하게 되었다. 10대에는 영화음악과 샹송을 좋아했다. 20대에는 결혼해서 무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라디오를 들을 여유가 없었다. 가끔 스모키의 노래가 귀에 많이 들어와 흥얼거리며 지냈다. 하지만 자동차에서 클래식을 들을 수 있었고 라디오에서도 고정 시간에 클래식을 들려주었다. 진주에 클래식 바가 한 군데 있었지만 한번도 들어가 보진 못했다. 나는 음정을 못 맞추는 음치라서 기관지나 폐 핑계를 많이 댄다. 호흡이 모자란다고. 

 여동생을 보면 한번 들은 노래는 바로 따라 부르는데 나는 100번쯤 듣고 연습해야 겨우 따라 부른다. 그렇다고 신이 없는 건 아닌데 차분한 편이다. 너무 차분해서 분위기를 망치는 쪽에 가깝다. 그런데도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마음이 불편할 때, 집중이 안 될 때 클래식을 듣는다. 요즘은 유튜브로 듣는다. 이젠 집에 레코드판이나 CD 플레어가 없다. 딸은 핸드폰으로 듣고 나는 컴퓨터로 듣는다. 

 시골 초가집에서 나온 가요는 온 마을에 퍼졌고 우리는 약간 우울한 정서에 얼릴 때부터 젖어 살았던 것 같다. 1970년대 드라마였던 “여로” 주제가를 이미자씨가 불렀는데 ‘그 옛날 오색댕기 바람에 나부낄 때 / 봄나비 나래위에 꿈을 실어 보았는데 / 날으는 낙엽 따라 어디론가 가버렸네 / 무심한 강물위에 잔주름 여울지고 / 아쉬움에 돌아보는 여자의 길 / 언젠가 오랜 옛날 볼우물 예뻤을 때 / 뛰는 가슴 사랑으로 부푼 적도 있었는데 / 흐르는 세월 따라 어디론가 사라졌네 / 무심한 강바람에 긴 머리 나부끼고 / 아쉬움에 돌아보는 여자의 길’

텔레비전을 켤 때마다 매일 들었던 노래와 슬픈 사연이 있었다. 온 가족이 한 방에 모여앉아 드라마에 빠져 안타까워 하였다. 우리는 그때부터 매스컴의 영향을 받으며 사는 인종이 된 것같다. 친정아버지는 가난하였지만 마음이 부자인 분이셨다. 비린내 나는 생선은 절대 안 드시고 입맛이 까다로워서 어머니께서 신경을 많이 쓰셨다. 생선은 주로 조기를 준비하셨다. 우리보다 더 가난해서 살 데가 필요한 5촌 고모께는 밭에다 집을 지어주셨고 진주로 이사갈 때는 살던 집을 제일 큰 고모가 살게 되었다. 셋째 고모집에서 일을 배워 밧데리사를 개업했을 때 큰 고모네 동생이 일을 배웠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공장을 아직도 사촌이 운영하고 있다. 우리 동생들 중 아무도 고향 집이나 공장에 대해 우리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날을 받아놓고도 버스 한 대를 대절 내어 온 친척을 불러 모아 전국 일주를 다니신 분이다. 욕심이 너무 없어 자기 건강을 못 챙기신 어리석은 분이다. 돈도 일푼도 없으면서 정음사의 클래식 해설집을 산 것은 지금 생각해 보니 멋진 짓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아버지의 피이다. 시집올 대 딱 한 권 들고 왔다. 금성출판사에 출판한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전집(韓國現代美術代表作家100人全集) 중 박수근편이 들어있는 4권을 들고 와서 친정 여동생이 화를 낸 적이 있다. 하필 그 책을 가져갔느냐고 원망이 대단했다. 한 30년이 흐른 후 덕수궁에서 동생과 같이 박수근 화백의 그림 전시회를 같이 보게 되었다. 오래 되어 낡고 색이 바래가지만 저 속에 나의 바탕이 들어 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자산은 돈이 아니라 안목이었고 예술을 사랑하는 혼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집에 전집으로 책을 사면 아이들이 안 읽는다고 하지만 눈에 보이는 책에 손이 갔다. 지금도 옥색의 정음사 전집이 궁금해서 펼쳤던 기억이 난다. 글씨는 작고 문장은 길었다. 문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시간이 오랜 걸렸다. 어떤 책은 수십 년이 지나서도 낯설고 어설펐다. 만날 때마다 새로운 연인이 되었다. 인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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