쳇바퀴 구르는 햄스터에서 내 모습을 보았다
“지하철만 연결되면 어디든 상관없어.”
그 무성의했던 한마디가 얼마나 오만한 것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경기도 부천 상동에서 강남역까지의 출근길. 7호선 상동역은 이미 인천에서부터 사람을 가득 실어 나른 ‘지옥철’의 전초기지였다.
숨 쉴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 인파 속에 몸을 구겨 넣으며 깨달았다. 서울의 집값 급등으로 밀려난 이들이 매일 아침 골병을 얻어가며 도심으로 실려 나가는 이 노선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냉혹한 단면이라는 것을.
1시간 20분의 사투 끝에 사무실에 닿으면 이미 영혼은 탈탈 털려 재만 남은 상태가 됐다.
‘한겨울에도 이 정도인데, 여름엔 대체 어떻게 견뎌야 하나’ 하는 막막함이 매일 아침 나를 덮쳤다.
하지만 진짜 비극은 집 밖이 아니라 집 안과 사무실에 있었다.
8년 만의 귀국. 4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팀장 자리를 맡은 건 행운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독배였다.
내가 맡은 팀은 이미 6개월 넘게 수장이 공석이었고, 배는 이미 기울어 선수만 겨우 남은 상태였다.
뒤늦게 올라탄 선장이 필사적으로 물을 퍼내 보았으나, 8년의 공백을 가진 내가 가라앉는 배를 다시 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한 달 만에 팀은 공중분해 됐다. 내 새카맣게 타버린 속도 함께 가루가 되었다.
주재원 시절부터 만성이었던 불면증은 더 심해져 잠 못 드는 새벽, 거실로 나오면 딸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들인 햄스터 한 마리가 고요를 깨고 있었다.
덜컹, 덜컹, 덜컹.
좁은 케이지 안에서 맹렬하게 돌아가는 쳇바퀴 소리. 밤새도록 제자리를 달리는 그 녀석의 뒷모습이 꼭 내 인생 같았다.
8년을 갈아 넣어 얻은 결과가 고작 이 좁은 전셋집과 멈출 수 없는 쳇바퀴뿐인가 싶어 목이 메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지하철 안에서 80kg에 육박하는 내 몸이 인파에 밀려 공중에 붕 뜨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덮쳐왔다.
숨이 막혔다. 다음 역까지 가는 2분이 2시간처럼 길게 느껴졌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투를 벌이며 인파를 뚫고 내렸다.
승강장에 주저앉아 세 번의 열차를 보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아니야, 명색이 팀장인데 출근은 해야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다시 열차에 올랐지만, 그날 이후 밤마다 다음 날 아침에 대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공황 증상이었다.
점심시간이면 강남역의 차가운 빌딩 숲을 미친 듯이 걸었다. 가만히 있으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으니까.
화려한 ‘서초OO’ 아파트 단지들을 지날 때마다 비참함은 극에 달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정신과 클리닉’ 간판. 몇 번을 망설이다 문을 열었다.
의사 앞에서 지난 8년의 영광과 현재의 초라함을 하소연하듯 쏟아냈다. 의사는 묵묵히 듣더니 중독성 없다는 우울증 약을 처방해 주었다.
하지만 병원을 나서는 발걸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약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퇴근길, 유튜브 알고리즘이 내게 ‘셀프 가스라이팅’이라는 영상을 던져주었다.
“제발, 당신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세요.” 그 말 한마디에 지하철 한구석에서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가 나를 너무나 가혹하게 몰아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이, 내가 너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나는 출근하지 않았다. 팀장이 다 무슨 소용이고 직위가 다 무슨 소용인가. 내가 죽게 생겼는데.
“그래, 여기서 멈추자.”
귀임 3개월 만에 팀장직을 내려놓았다.
직장 생활 15년 만에 처음으로 내린, 나를 살리기 위한 항복 선언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