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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ri Nov 25. 2023

교권보호위원회가 열렸다.

- 떠나야 할 아이와 남겨진 아이들 

월요일 아침, 교무실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한 선생님이 출근을 하지 않았고 주말 사이 교권보호위원회를 요청했다는 이야기였다.

순간 한 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A인가요.”

이야기를 전한 옆자리 선생님은 어떻게 알았냐며 놀라워했지만 나 또한 어떤 정보를 듣고 한 말은 아니었다. 3학년, 교권보호위원회. A라면 충분히 한 선생님을 벼랑 끝에 몰 만한 일을 벌였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3월에 만난 A는 교권보호위원회의 계기를 만들 만한 아이는 아니었다.

수업을 들을 의지는 없지만 에너지는 넘치는 학생.

장난기가 가득하고 집중력이 짧아 수업 중간에 화장실, 보건실 등을 가려고 애쓰는 학생. 학기 초 몇 번의 수업을 진행하며 ‘아, 이 반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하는 학생이구나, 골치는 좀 아프겠지만 어르고 달래며 한 해 잘 꾸려봐야겠구나.’ 정도의 결심을 하게 하는 아이였다. 그렇게 한 학기, 때로는 얼굴 붉힐 일도 있었고 상담도 여러 차례 했다. 그 반을 들어가는 모든 교과 선생님들이 ‘아이고, A 고 녀석.’하며 공감어린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담임 선생님 속도 더러 썩이며 품에 안고 가던 학생이었다. 


여름 방학이 지난 2학기, A의 눈빛이 달라졌다. 마음의 색이 얼굴에 그대로 비치는 나이, 아이들의 변화는 어른들과 달리 자세, 눈빛, 표정 곳곳에서 드러난다. 한 달 남짓한 방학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은 그간 서서히 눌러왔던 틈이 일시에 터져 버린 건지 A의 행동이 정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A는 본래에도 학교는 꼬박꼬박 나오는 학생이었다. 아침 일찍 등교해 어떤 수업도 성실하게 듣지 않고 복도를 배회하거나 보건실에 머물거나, 자거나, 장난을 치며 일상을 보냈다. 제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학교를 다니던 태도가 2학기 들어 극대화된 것이다. 

A는 주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그대로 분출했다. 수업 시간에 갑자기 노래를 부르거나, 책상 위로 두 다리를 올리거나, ‘탕’ 소리가 나게 책을 바닥에 내리 꽂는 등 돌발 행동이 잦아졌다. 

“이게 무슨 행동이지?” 교사가 화를 낸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A가 대답한다.

“방금 네가 한 행동을 분명히 봤는데.” 교사가 말한다.

“저 아니라니까요, 증거 있어요?” A가 반문한다. 

반 분위기는 얼어붙고 수업은 멈춘다. 끝까지 대화를 이어 나가다 보면, 큰 소리로 화를 내는 선생님도 있고 서로 감정이 격앙되어 복도까지 나가기도 하지만, 건들건들한 자세로 조롱 섞인 대답만 맴돌 뿐이다. 

나의 경우 A가 이런 행동을 할 때 가만히 눈을 마주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A가 “왜요?”라는 말을 하고,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대화할까? 아니면 이어서 수업하게 해 줄래?”라고 묻는다. A는 “가만히 있을게요.”라고 대답하고 상황은 종료된다. 부끄럽지만 일을 ‘크게 만들지 않는 선’에서 봉합하며 아슬아슬 줄타기를 이어 나가는 방식이다. 상황은 금세 종료되고 다시 수업을 진행하지만, 얼어붙은 반 분위기를 녹이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  


A에 대한 지도가 어떤 방식이든 교육이 아닌 상처로 끝나는 것은, A의 행동이 의도적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에 대한 적대심이 크고, 어차피 자신의 인생은 망했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는 아이. A의 마음에는 어른과 통제에 대한 적개심이 크다. 분노의 원인이 누구든 현재 A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아니다. 그러나, 


-같은 어른. 

나를 통제할 권한이 있는 사람.

그러나 내가 아무리 함부로 대해도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사람.- 


이러한 조건을 갖춘 ‘교사’에게 상처를 주고, 화를 유발하는 방식으로 그 누군가에게 복수를 한다. 여기서 교사는 어디까지나 화풀이 대상이 된다. 이런 학생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는 상처를 회복할 만한 헌신이 필요하다. 그 어떤 선생님도 노력 없이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너지가 무한대로 샘솟지 않는 ‘사람’인 ‘교사’가 한정된 에너지로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수업을 듣고자 하는 다른 더 많은 학생들을 지켜야 할 힘도 필요하기에 미봉책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변명이라 해도 할 수 없으나, 힘에 부치는 것은 사실이다.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는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만큼 힘든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A가 기어이 수업 시간에 ‘성적 행위’로 교사를 조롱했다.

2주 간 반복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해당 선생님은 처음에는 두 눈으로 본 것을 믿지 않았고, 그 다음엔 외면했고, 점차 두려워하기에 이르렀다. 수업을 하기 위해 문 앞에 서서 오늘은 A가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월요일을 앞둔 주말에, 밀려드는 자괴감과 무력감 앞에서 ‘보호’받기를 요청한 것이다.

교사가 ‘교권보호위원회’를 요청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다른 선생님으로부터 무능력하게 비칠 수 있다는 부끄러움, 다시 학생들 앞에 설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감정보다 ‘보호’받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앞서야만 가능한 일이다. 피해자가 되어 상황을 진술하고 모든 과정과 결과를 직면하는 괴로움도 이어진다. 


교권보호위원회 절차가 시작되고, A에 대한 교과 교사들의 ‘교사 의견서’를 자율적으로 받도록 했다. 내가 ‘교사 의견서’를 작성한 이유는, A가 아닌 다른 학생들 때문이었다. 

A는 훤칠한 외모에 존재감이 크고,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친화력이 높은 학생이다. 가장 높은 징계인 강제 전학을 받더라도 어딜 가든 잘 적응해 지낼 것이다. 교권보호위원회가 열린다 소식을 들은 직후, 스스로 자신이 장본인임을 소문내고 ‘교권’을 가사에 넣어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이런 A가 진심어린 반성을 하게 할 방법이 당장은 없다. 그렇다면 잘못에 책임을 지는 모습만이라도 보여 줘야 한다. 남은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서, A가 변함없는 일상을 보내게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실제로 A 주변 학생들 중 4명의 눈빛이 함께 변하는 것을 지켜봤다. 수업을 잘 듣지 않고 불성실한 학생들은 종종 있으나 적어도 자신의 판단에 의한 것이며 A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그런데 수업을 잘 듣고 정도를 지키던 아이들 중 ‘조금은 나도 놀아보고 싶은’ 딱 그 정도의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 A의 행동을 지켜 보며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무슨 짓을 해도 학교가 건드릴 수 없는 센 친구, A" 

그 옆에서 A의 말에 웃고, 그 행동을 따라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과서를 가져오지 않고, 슬그머니 거짓말로 잘못을 회피하려 하고, 책상 옆으로 한 다리를 뻗는 자세까지 따라하는 모습을 보며, ‘교사 의견서’를 쓰기로 결심했다. A가 아닌 남겨질 아이들을 위해서. 


무슨 짓을 해도 학교가 건드릴 수 없는 센 아이가 아니라,

그간 어떻게든 품고 가려고 배려했던 선생님의 마음이자 학교의 자세였던 거라고.

결국 정도를 넘어선 행동으로 그 선을 넘어섰으니,

정당한 책임을 지는 것으로 마지막 교육을 할 거라고 이야기해야 했다.


A는 존중 받아 마땅한 학생이나, 수업과 지도를 통해 자신을 성장시킬 권리를 스스로 저버린 학생이라고 진술했다. 잘못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교육을 통해 A가 성장하길 바란다고 호소했으며, 같은 반 다른 학생들을 위해 수업을 정상화하고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각자의 사연을 품은 교사 의견서가 13장이 모였다. 


교사 의견서는 실상 교권보호위원회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의미한 숫자로 모인 교사 의견서는 적어도 A에게 그간 자신이 조롱하고 무시해 온 선생님들이, 자신의 치기어린 어리광을 받아주고 배려해 준 것이었음을 깨닫는 작은 계기라도 되었기를 바란다.


수 차례의 회의 끝에 내린 교권보호위원회의 결정은 ‘강제 전학’이었다. 학부모는 재심을 요청했고, 실행은 보류되었다.이 기간 동안 A를 제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대로라면 전학이 가능한 시기를 넘겨, 자연스럽게 졸업을 하게 된다. (A의 부모님에게 조금이라도 선생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매일 그렇게 학교에 보낼 수 있을까. 재심이라는 마땅한 권리를 사용하더라도, 적어도 체험학습 등을 활용해 A를 당분간만이라도 집에서 반성하게 할 수는 없었을까.)


해당 선생님은 여전히 학교에 나오지 못하고 있고, A는 늘 그렇듯 일찍 등교해 일상을 보낸다. 반 아이들 중 몇몇은 울면서 교무실에 찾아 왔다. 왜 A 때문에 우리가 수업을 듣지 못하고, 그 선생님을 보지 못하냐며 호소한다. 이 또한 남겨진 아이들이다.


결정이 A에게 가혹한가. A에게 경미한 처벌을 내리거나 또는 아무 처벌도 내리지 않고, 학교에서 변함없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도록 안고 가는 것은 교사만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니다. 교사의 몫만이라면 할 수도 있다. 상처야 받으면 될 일이다. 화가 나면 삭히면 된다. 어른이니까, 선생님이니까 이 악물고 버티자면 버틸 수 있다.  

그러나 학교에는 수업을 열심히 듣고자 하는 아이들, 잘못된 영향을 받으며 악감화된 아이들도 존재한다. 


교권보호위원회의 내용은 사례마다 다르다. 이를 일반화하여 면면을 따져 보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벼랑 끝에 몰린 교사가 ‘보호’받기 위한 장치가, 또 다시 교사와 학생의 대립, 교사가 인내하면 될 일, 교사답지 못한 교사의 행동으로 치부되지 않길 바란다.

 

교권 보호는 학생들을 보호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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