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의 하루를 걷다
아침의 공기가 아직 차가운 시간,
나는 구례의 ‘사성암’으로 향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었지만,
어디서 들었던 말이 남아 있었다.
“한 번 보면 빠져든다”고.
차를 타고 산 중턱까지 올라가 보니
생각보다 편안했다.
하지만 마지막 구간에서
사성암은 본색을 드러냈다.
짧지만 숨이 턱 막히는 오르막길,
몸을 조금만 내밀면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아찔함.
그 길 끝에서 마주한 풍경은
말 그대로 ‘압도’에 가까웠다.
절벽에 그대로 붙어 있는 암자 한 채.
무협 영화나 쿵푸팬더 속에서나 보던 배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국의 산사가
이렇게 이국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사람이 많지 않아 더욱 고요했다.
산 속에 걸린 암자 하나,
그 앞에 서 있는 사람들
바람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절벽을 감싸고 있었다.
사성암에는 작은 이벤트 상품들이 있다.
기와 한 장에 이름과 소망을 적어 두고 오는 것.
평소의 나였다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오늘은 괜시리 마음이 움직였다.
“이런 건 미신이야.”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느새 기와 위에 글을 적고 있었다.
누군가 좋다고 해서,
또 누군가는 꼭 하고가야 한다해서,
그런 단순한 이유가
이상하게도 마음을 붙잡았다.
만원짜리 기와 한 장이었지만,
돌아서고 나니
그보다 더 큰 무언가를
내려놓고 온 기분이었다.
점심을 먹고
식당을 나오니
화엄사 근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밥을 먹고 산책을 하기엔
더할 나위 없는 위치였다.
화엄사는 사성암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사성암이 절벽 위의 ‘기세’라면,
화엄사는 땅을 지키는 ‘중후함’이랄까.
천 년의 시간을 품은 듯한 건물들,
광장처럼 넓게 펼쳐진 경내,
사람이 있어도 고요함이 유지되는 묵직한 분위기.
각황전 앞에 서 있는 동안
이 절을 거쳐간 수많은 시간과 사람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쌓여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찰을 걷는다는 건
어쩌면 시간을 걷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성암에서 절벽을 마주하고,
산채백반으로 허기를 채우고,
화엄사에서 천 년의 시간을 걸었다.
유난히 복잡하지 않은 하루였는데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이상할 만큼 마음이 편안했다.
구례라는 장소가 주는 힘인지,
뜻박의 장소를 알아서 그런지,
아니면 절벽 위 풍경이
아직도 가슴에 걸려 있어서인지
정확한 이유는 뭔지 모르겠다.
다만 이 하루가
나에게는 오래 남을 것 같다는 직감만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