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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터너티뷰 Jul 18. 2022

‘음악적 성숙함’에 대하여-2.

Twenty øne Pilots, [scaled and icy]

[scaled and icy], by Twenty One Pilots. 2021


“이해하기 쉽다면 거기서 끝나버리는 것이죠.”

-안노 히데아키



 사실 나는 안노 히데아키의 팬이 아니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안노 히데아키가 누군지도 모른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제대로 본 적도 없고, 히데아키의 스타일이나 철학도 모른다. 애초에 시리즈물을 보는 걸 힘들어해서,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보다는 영화를 훨씬 좋아한다.



“‘그렌라간’은 본 적 있어. 되게 재밌게 봤던 것 같은데”


“갑자기?”


“그냥…, 둘 다 가이낙스에서 만들었다니까, 관련 없나?”


“응, 아예. 그래도 최대한 연결점을 찾으려고 애썼네.”



 아마도 저 문장 또한 위키를 들락거리며 슬쩍 훑어본 얕은 지식들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리라. 그렇지만 문장의 의도에 대해서는 십분 동의한다(당연하지만 무작정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라는 말이 아니다).

 이전 글에서 어렵게 풀어 말했던 ‘층위’의 중요성과 효과를 한 문장으로 줄여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하고싶은 말이 저거였다. “한 번에 쉽게 이해해버리면 지루하고, 아예 난해하면 포기해. 그 사이를 잘 찾아야 잘 만든 작품인데, 그 방법은 알아서 해”가 요점이었다.


 나는 쓸데없이 말을 어렵게 돌려하고, 글을 어렵게 풀어쓰는 안 좋은 버릇이 있어서, 누군가가 잘 함축해준 언어를 인용하지 않으면 글을 못 쓴다. 고마워요, 히데아키!


그래서 안노 히데아키의 캐치프레이즈와 트웬티 원 파일럿츠가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면, [trench]에서 이어지고 추가된 [scaled and icy]의 ‘층위’를 말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글에서는 음악적 요소만을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가 없다. 이 부분을 먼저 말해야 바뀐 음악성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또 내가 음악 전공자가 아니라서…,



[scaled and icy]의 앨범 커버 촬영 현장.

[scaled and icy]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앨범 자체가 ‘이중 층위’를 가졌다는 점이다. 제목부터 살펴보자.

 제목의 의미는 ‘scaled back and isolated(쪼그라들고 고립된)’를 줄인 표현으로, 3집과 4집 사이에 있었던 싱글 ‘level of concern’의 주제인 코로나19의 팬데믹 생활을 이어간 것이다.


 수록곡을 들어보자. 10번 트랙 ‘No chances’ 이전까지 통일된 가볍고 활기찬 분위기는 레게와 일렉트로니카를 덜어내고 그 자리에 들어간 디스코/펑크/소울 장르의 접근으로 나타난다.


 그에 상응하듯-이전의 앨범에도 매우 자주 사용되던 요소지만-더 두드러지는 밝은 피아노와 우쿨렐레, 팬데믹과 타일러 조셉의 결혼에 영향을 받은 낙관적 메시지들은 표면적으로 봤을 때 ‘아, 성숙해졌구나”라는 반응을 자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결혼을 하더니 사람이 부드러워진 건지, 혹은 코로나 기간동안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을 알아차린 건지…,’ 추측하면서 말이다. 어른이 된 것과 성숙해진 걸 어떻게 구분하느냐에 대한 문제일 수도 있다.


 나쁘지 않다. 충분하다고 할 수도 있다. 새로운 장르적 접근이기에 깊이 자체는 떨어질 수도 있고, 2집~3집의 주제는 완전히 털어냈을 수도 있고, 이제는 좀 식상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은 뭐 여전히 큰 영향을 가지는 소재니까…, 라는 애매한 감상이 나올 때 즈음 ‘No chances’가 뜬금없이 튀어나온다. 두 번째 이야기의 시작이다.


 9번 트랙 ‘Bounce man’의 우쿨렐레를 잘 듣고 있었더니 난데없이 콰이어(choir)와 함께 3집에서 숱하게 들었던 트랩 비트를 다시 듣게 된다.

 3집 [trench]를 들으면서 4집을 기다린 충성심 있는 팬이라면, 혹은 ‘bounce man’까지 애매한 감상과 함께 위화감을 느꼈던 눈썰미 좋은 리스너라면 아직 3집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데마(Dema)와 9명의 주교들은 아직 우리를 쫒고 있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자. 아티스트들이 제목에 무언가를 숨기는 일은 의외로 잦으니까 말이다. [scaled and icy]의 애너그램은 [clancy is dead]다. 맞다. 3집의 화자는 ‘clancy’다.


 애너그램은 억지인 감이 있다면, 사실 ‘bounce man’의 가사에서도 ‘그들이 오기 전에 멕시코로 떠나는 게 나을 거다’라는 뉘앙스의 가사가 연속해서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No chances’는, 분위기에서 당연하지만, 주교들이 ‘도망칠 기회는 없다’라고 말하는 내용의 곡이다.


 3집에서는 세계관을 쓰더니, 이번에는 퍼즐을 제대로 쓰기 시작한다. 만약 당신이 앨범의 첫 출시에서 이 사실을 캐냈다면, 숨은 퍼즐을 찾아낸 카타르시스에 만족할 때 즈음 유튜브에 뮤직비디오가 나왔을 것이다.


https://youtu.be/FiXVRdotCEk

'saturday'의 뮤직비디오, 앨범 내의 순서와 다르게 5번 트랙인 'saturday'가 서사상 먼저 위치한다.

https://youtu.be/eNcvblM8-_o

'The outside'의 뮤직비디오.



4번, 5번 트랙 ‘The outside’와 ‘Saturday’의 뮤직비디오는 데마(Dema)를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 있는 클랜시(clancy)의 내용을 그린다. 주교들의 추격으로 인해 바다 속에서 잠수함이 침몰되기도 하고(이 시점에서 클랜시가 한 번 죽었을 수도 있다), ‘chlorine’에서 나왔던 괴생명체가 사는 섬에 표류되기도 한다.


 이후엔 그 괴생명체들의 도움으로 주교들에게 반격을 하기도 한다(영상의 연출로 볼 때, 주교와 데마로 표현되는 정서 불안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은유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클랜시(혹은 타일러 조셉)의 뒤를 이어 데마로 탈출할 인물들을 조명하며 4집의 서사가 끝이 난다.


 내가 영어권의 청취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서사와 퍼즐에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더 클 수도 있다.

 왜냐하면 ‘No chances’이전까지의 곡들은 가사를 함께 보면 ‘곡’만 밝았기 때문이다. 두 개의 층위가 나뉘어 있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가장 밝은 분위기의 곡인 ‘good day’는 소중한 이를 잃은 상황을 감당하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난 괜찮아, 오늘은 좋은 날인 걸’ 하고 반복되는 후렴은 표면적 층위-코로나 팬데믹-에서든 두 번째 층위에서든 비슷한 감정을 일으킨다.


 ‘choker’는 어떨까, 농구에서 자유투를 전부 실패하는 것을 이르는 용어인 ‘choking’에서 따온 이 곡은 관계에서의 실패와 자기 비하로 이어지는 심리적 압박을 이야기한다.


 ‘No chances’이후에 오는 마지막 트랙 ‘Redecorate’는 아들이 죽은 이후, 아들의 방을 그대로 두는 친구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 이야기다. 트웬티 원 파일럿츠는 줄곧 죽음을 소재로 사용했지만, ‘내 죽음 이후에 내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그들이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 나아가서 자신들이 창작한 것들에 대한 성숙해진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조명해야 할 것은 이번에도 퍼즐이 아니다. 퍼즐을 풀어낸 카타르시스에만 머무르면 바뀐 음악성과 표면적 층위는 말 그대로 ‘표면’만이 된다. ‘Redecorate’에서 알 수 있듯 [scaled and icy]는 단순히 2집과 3집의 반복이 아니다. 그랬다면 클랜시가 죽을 이유도 없었겠지.


 ‘Saturday’와 ‘shy away’에서 보이는 타일러 조셉의 모습은 희망적인 앨범의 분위기가 단순히 위장으로만 활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두 곡 내에서 타일러 조셉은 꾸준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날 놓지 말라고 호소하고 있고, 같이 있어주겠다고도 말한다. 앨범의 가사와 서사에 반하는 메시지와 음악은 장치가 아니라 정말로 메시지 자체인 것이다.

 데마를 탈출하고 있는 이들과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다시 버팀목이 되어주겠다는 메시지는 ‘clancy is dead’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2집에서 자신을 ‘blurryface’라고 칭했던 타일러는 3집에서 ‘blurryface’를 자신과 분리시켜서 그에게서 도망친다. 그리고 4집에서, 도망치던 ‘clancy’는 죽었다고 말하고, 자신을 도망치게 한 것과 마주 보며 다른 이들을 도와줄 수 있을 정도로 이들은 성숙해졌다.


‘blurryface’에서 ‘clancy’로, ‘clancy’에서 이제는 다시 ‘타일러 조셉, 조쉬 던’으로, 트웬티 원 파일럿츠는 자신들의 성장기를 훌륭하게 끝냈다. 그리고 4집의 끝에서 보이듯이 이제 그들의 성장기는 팬들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당신들이 성장통을 겪고 있는지, 그들과 함께 성숙해졌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응원하는 사람은 이미 주변에 있거나, 생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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