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에 중독된 뇌는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 멈추었다. 숨을 쌕쌕거리며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는 환자였다. 숨을 몰아쉬던 환자는 이렇게 말했다. “가만히 누워있어도 100미터 달리기를 하고 있는 것 마냥 숨이 찹니다. 이식만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 데 분명 달리기를 하는 것 마냥 숨을 빠르게 헐떡이고 있었다. 얼마나 힘들까! 매순간 쉼없이 달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니. 그 모습을 잠시라도 보는 것이 힘들었다. 옆에 있던 남편은 채널을 돌리라며 채근했다. 나도 그리했다. 마음이 너무 안좋았다. 그리고 순간 내가 가지고 있던 걱정거리들을 아무것도 아닌 듯 내려놓았다.
행복한 삶이 바로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대체 신체적 고통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창가를 보며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행복, 마른 가지들 속 흩날리는 눈발을 보는 행복, 이제 곧 점심에는 맛난 수제비를 먹을 수 있다는 기대에 찬 행복. 나의 눈, 귀와 배고픔을 느낄 수 있는 이 위장이여. 그 모든 게 행복이다.
누구는 고급 차가 없어서 실망하고 누구는 매달 들어오는 수입이 작다며 투덜대고, 또 누구는 좋은 보직으로 가지 못함에 좌절한다. 나는 그 어떤 것도 우리 신체의 건강함에 비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 하루 맛난 쌀밥 한 그릇과 김치 한 조각으로도 배는 부를 것이고 가슴 저리는 음악 들으며 서정에 젖을 수 있을 것이고 이 모든 것은 그리 많은 부와 자리가 아니어도 될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면 좀 빨리 철이 든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지, 아니 돈을 많이 버는 걸 성공이고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을 만난다. 부모의 욕망을 그대로 흡수한 건지 아니면 그들이 접하는 매체들로부터 이미 내면화된 건지 모르겠다. 그런 아이들을 내버려 두면 차츰 사회의 현실에 분노하고 비판적인 의식을 갖게 된다. 사회 수업 시간에 아이들은 그런 자신들의 속내를 가감없이 드러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수업이 끝나고 남은 자투리 시간에 이렇게 종종 얘기했다.
“얘들아 너무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마라. 부자되면 뭐할거니? 선생님은 이렇게 생각한다. 있잖아? 짜장면 먹을 수 있잖아? 나는 짜장면 먹고 싶을 때 짜장면 먹을 수 있는 사람이면 부자라고 생각해. 어차피 부자든 가난한 자든 하루 세 끼면 되는 거잖니? 우리 성적 1점에 너무 애면글면 하지 말자. 중요한 건 우리가 함께 하는 거야. 너의 부든 나의 부든, 너의 1등급은 2에서 9등급까지의 아이들이 받쳐주는 거잖아? 꼭 네가 잘나서만 되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우리 함께 항상 같이 잘 살아야 해.” 라고. 아이들은 뭔가 거창한 부자이론을 듣게 되는구나 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다가 바람빠진 풍선처럼 수그러들었다. 그러면서 웬 짜장면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떠올리면서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더 가지지 못해 싸운다. 남들보다 더 우위에 서지 못해 시기하고 부러움을 애써 감추며 자신이 더 잘났다고 자위한다. 다른 이의 성공에 힘껏 박수쳐 주지 못하는 못난이들이 가득하다. 이런 사회에 너희들을 내어놓아야 해서 나는 미안하고 두렵다. 그래도 우리 짜장면만 먹자. 제발. 때로는 옆식탁 짬뽕값도 내어줄 수 있는 멋진 사람이 되는 걸로 부자를 퉁치자. 선생님이 더 잘할게. 더 노력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