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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ain Sep 20. 2024

변명

01

재현은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고민에 잠겨 있었다.

자가복제라도 하는 듯이 한 가지 고민이 여러 고민으로 증식되어 그의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집어놓았다.


'첫마디가 중요하다. 뭐라고 입을 떼야 의심을 피할 수 있을까...'


이미 자취방 한가운데에서 머리를 싸매고 정수리 온도를 끌어올린 그였지만 아직 첫 문장조차도 그에겐 정리되지 않았다.


재현은 그제야 벌떡 일어나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그것은 오늘의 첫 움직임이었다.

오래 앉아있어서 그랬는지 사타구니에 고인 땀이 주룩 쏟아졌다.


그러고는 한때 '빌트인'이라는 말에 속아 기뻐했던 싸구려 2 도어 냉장고 위에서 먼지 쌓인 전단지 한 장과 주황색 펜 한 자루를 가져왔다.


그는 전단지 뒤에 알고리즘 순서도를 그렸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이것은 인간적인 면모를 한참 벗어난 행동이기에 인간다운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생각을 정리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정했다. 기계처럼 냉정하게 생각해 보기로.


재현은 현 상황을 최대한 간단하게 도식화했다.

그러자 문제의 해결책도 두 가지 경우의 수로 간단해졌다.

'진실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조작할 것인가.'


전자의 경우 고민은 단박에 끝나겠지만,

사건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본인이 혼자서 책임져야 한다는 리스크가 있었다.


그래, 속이야 시원하겠지. 하지만 남은 인생을 타인의 손가락질 속에서 불안의 곁눈질로 그들의 표정을 살피며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알리바이를 조작하는 것은 자신 있었다.


재현은 타고난 조작꾼이었다. 그는 거짓말에 능했고, 연기의 귀재였다.

학창 시절 내내 시험을 아무리 망쳐도 어른들의 눈을 속이는 건 그에게 있어서 의식과 무의식 둘 중 어디에도 없는 재채기 같은 것이었고,


들키지 않고도 두 여자와 착실하게 사랑을 나누는 것 역시 그에겐 방과 후 취미활동 같은 것이었다.


'그래, 속이자.'


재현은 더 긴 고민 없이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잘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긴장 풀자. 그동안 밥 먹듯이 해오던 일이잖아.

시간 순서, 인과관계만 꼬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가장 큰 매듭이 풀어지니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진짜 고민해야 할 것이 보이니 걱정도 줄어들었다.


'그래, 16일부터 배탈이 났다고 짜보자. 어디 보자. 내가 그날에 만났던 사람이..'

재현은 눈을 지그시 감고 엊그제로 돌아갔다.

그는 같은 과 동기 형준과 PC방에서 서너 시간 정도 게임을 했다.

그리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옆자리에서 형준이 청소기처럼 빨아들이던 안성탕면 냄새를 참지 못하고 라면 한 그릇과 참치 김밥 한 줄을 시켜 먹었다.


'좋아, 그때 먹은 음식이 문제였다고 말하자. 어차피 형준이는 이번 주말에 고향에 간다고 했으니까. 그럼 나를 의심할 사람은 이제 없다. 완벽해. 김재현, 역시 너는 천재야!'


재현은 자신의 거짓말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이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 내지는 적성이라고 생각했다.

재현은 자신이 짜 놓은 알리바이의 완성도를 위해 자기 최면까지 걸기 시작했다.


'난 배탈 환자다. 자꾸만 설사가 나오고, 먹는 것마다 게워낸다.

'나는 심각한 복통에 시달리고 있다. 외출은 물론 장시간 의자에 앉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저 침대에 눕는 게 지금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동작이다.'


재현의 두 번째 장점은 자기 최면이었다.

그는 어느새 생각만으로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고, 실제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정말로 배탈이라도 난 듯이 아랫배가 부글부글 아팠고, 이윽고 묽은 변이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변기 속을 채웠다.


그는 배를 움켜잡고 아파했지만, 이상하게 입꼬리는 실룩실룩 움직였다.

'좋았어. 이 정도면 완벽하다.'


30분쯤 뒤, 그는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몸에서는 으슬으슬 냉기가 느껴졌지만 얼굴에선 열감도 올라왔다.

하루종일 아이디어를 짜느라 물 한잔도 마시지 않고 다섯 평짜리 탁한 방구석에서 담배만 피워댔으니 정상적인 컨디션일 리가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곧바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겠지만

그는 뻘겋게 부어오른 눈을 부릅뜨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는 20시 30분을 알리고 있었다. 앞으로 30분만 더 지나면 전화가 올 것이었다.


'오늘 밤만 무사히 넘기면 된다. 오늘 밤만...'


어느새 그의 호흡은 가빠지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육체는 촛농처럼 삽시간으로 타들어가는 중이었지만 정신만큼은 무대에 오르기 직전의 가수나, 올림픽 금메달 결정 경기에 나선 선수, 또는 전쟁터로 진격하는 이등병처럼 또렷했다.


'이제 10분 전...'

어느덧 약속의 시간이 되었다.

재현은 사력을 다해 흐물흐물해진 눈꺼풀을 휘어잡았다.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진동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는 벽에 간신히 기댄 상체를 일으켜 화면을 터치했다.


휴대폰을 슬금슬금 확인하는 자신의 모습이 탁상 거울에 비치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재현은 문득 자신의 처지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거절을 잘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인가?


재현은 떨리는 손의 경련을 애써 부여잡고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진동의 이유는 전화가 아닌, 지난날 설정해 둔 9시를 알리는 알람 소리였다.

'젠장, 놀랐잖아!'


재현은 화면의 이곳저곳을 누르며 혹시나 다른 연락이 온 건 아닐지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도 어떤 채팅에서도, 어떤 문자에서도 그를 찾는 연락은 없었다.

그러던 사이, 갑자기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놀란 재현은, 무심코 화면을 건드렸다. 전화를 받아버린 것이다.


[어어, 재현아 난데. 너 그 얘기 혹시 못 들었냐?]

"어, 민철아. 무슨 얘기?"

[영준이랑 정훈이 오늘 배탈 나서 약속 못 올 거 같대. 걔네 어제 PC방에서 뭘 잘 못 먹었다는데 넌 괜찮냐?]

"배... 배탈?"

[그래, 배탈. 나도 오늘 거기서 점심 먹긴 했는데 그 얘기 들으니까 갑자기 속이 안 좋네.

암튼 오늘 술 약속은 파투 내자. 애들도 컨디션 안 좋은데 술 마시긴 그렇잖아. 안 그래?]

"어어..."

[너 혹시 지난번처럼 갑자기 약속 깨려고 잔머리 굴리고 있던 거 아니지?]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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