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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과외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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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neSangSu Jeong Oct 07. 2016

초상화

과외 일기 No.201

2016년 03월 22일의 기록


  과외를 하다 보면 학생들이 고맙다며 이것저것 주는데 고등학생 친구들은 대부분 먹을 것을 주고 초등, 중학생 친구들은 어김없이 그림을 그려준다. 나를 보며 그림 그릴 때만큼은 수업할 때보다 한없이 진지한데 미술적인 파토스가 있어도 재능적 한계 때문에 맘껏 분출하지 못하는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감사이며 선물이다.


중학생 제자가 그려 준 초상화

 


오늘은 조금 특별한 초상화를 선물 받았다. 올 초에 수업을 시작한 8살, '한글'을 배우는 친구가 그려주었다.

 사실 지금껏 수능 국어와 수학을 가르쳤기 때문에 한글을 가르쳐 본 적은 없고 가르치겠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과외 중개하는 곳에서 연결시켜주었다.


 이 아이에게는 사연이 있다. 과외 중개소로부터 아이의 프로필을 받았는데 부모의 번호 대신 할머니의 번호가 적혀있었고 몇 분 뒤 걸려 온 전화로 아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이는 엄마가 없다. 6살 무렵까지 친모로부터 학대를 받았고 부부는 이혼했다. 아버지가 소송 끝에 아이를 찾아왔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함께 넷이 산지 이제 일 년 남짓되었다고 했다. 곧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하는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니 선생님께서 한글만이라도 떼어달라고 말씀하셨다.


 고민했다. 과외를 하면서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그중 한 가지는 '내가 잘 모르는 것은 가르치지 말 것'이다. 한글 교습법을 잘 모르기도 하고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모르기에 원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또한 상처가 많은 아이에게 내가 또 다른 상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다. 엄마가 없다는 공통분모가 있어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나의 오만함에 대한 경계이기도 했고.


 결론적으로는 한글 수업을 시작했다. 처음에 주의사항이 있었는데 '엄마'라는 단어와 아이의 본명을 부르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아이는 최근 가톨릭 세례명으로 개명했다.)  아이는 한 달이 넘게 매번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누구세요?'라고 묻기 일쑤였고 공부 안 한다고 소리 지르거나 문고리를 잡고 떼를 썼다. 할머니에게 맞고 울다 지쳐 잠들기도 했다. 그런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엄마라는 단어와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린 아이의 서사를 상상하며 기다렸다.


 두 달, 이제 세 달이 지나가는 지금. 떼도 쓰지 않고 수업시간에 집중도 잘한다. 수업이 끝나면 냉장고에서 보물처럼 아이스크림을 꺼내 수줍게 준다. 이젠 읽는 것엔 거의 문제가 없다 :) 맨날 받아쓰기 시간에 햄버거, 괜찮아를 불러달라는 것 빼고는.

 눈도 마주치지 않던 아이가 눈을 똑바로 보고 그려낸 그림. 선생을 쿡쿡 찌르던 연필로 그려낸 그림. 한글 선생님이 아니라 그림 선생님을 했어야 한다. 나와 공부한 시간 동안 늘어난 한글 실력보다 그림실력과 열린 마음의 폭이 더 넓을 테니까.


 같이 사는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줬더니 푸짐한 게 제법 닮았다고 했다...ㅎ

8살 과외 꼬맹이님이 그려 준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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