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생 Jul 04. 2024

어느 은퇴자의 일일

       

알람이 울리고 창가에 드리워진 능소화에서도 새소리가 들려온다. 새벽 5시. 10분 후에 또 울릴 테니 그때까지 명상하자. 말이 명상이지 그저 누워있다.           

다시 알람이 울렸지만 이번에는 간밤에 모기와 실랑이하던 기억이 몸을 붙잡는다.           

레트리버 사랑이가 먼저 일어나 내 옆구리로 파고든다. 그리곤 머리를 들어 내 배에 올리고 반만 뜬 눈으로  나를 지켜본다.      


그래 일어나자.     


남편 간식을 챙겨두고 말린 닭고기 한 개씩 알콩, 올리, 사랑이에게 물리고 집을 나선다.           

6시 수영 수강생들이 하나둘씩 물에 풍덩풍덩 들어온다. 3면이 유리로 되어있는 5층 수영장, 갓 떠오른 해를 맞으며 일정한 간격을 두고 수영하는 모습에서 생의 에너지를 느낀다.   

        

8시, 알콩이 올리 사랑이 순서로 세 번 산책을 하고 맛난 아침을 챙겨준다. 그리곤 커다란 집게와 종량제 봉투, 텃밭에서 재배한 상추 샐러드를 챙겨 들고 화정역으로 향했다. 행복시민 오프모임에서 쓰레기 줍기로 한날이다.      


역 주변인데 생각보다 거리가 깨끗하다. 눈여겨보니 작은 담배꽁초가 구석구석에 의외로 많다. 차라리 보이는데 버리면 줍기나 쉽지, 원! 그래도 훤한 데에 버리기는 낯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길가에 똥 싸는 이를 꾸짖던 공자가 길 한가운데 똥 싸는 이는 지나쳤다는 일화가 떠오른다. 이에 의아한 제자가 물으니 길가에 싸는 이는 그나마 양심은 있어서 가르치면 되지만 저놈은 양심 자체가 없는데 무엇을 어찌 가르칠 수 있겠느냐고 공자가 말했다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구석에 버려진 담배꽁초가 달리 보인다.      


40분쯤 줍고 어린이 박물관에 들어가니 시원하다. 모자에 선글라스로는 턱도 없는 30도 기온에 달궈진 몸을 식힌다. 도시락을 펼쳤다. 먹을 때가 제일로 행복하다. 또 마음 나누기를 하고 다음 쓰줍을 계획한다.        

  

드럼학원 오픈이 3시라 중간에 시간이 뜬다. 인근 아파트 단지에 작은 도서관으로 가볼까. 아뿔싸 1시까지 점심시간이라고 안내문이 붙어있다. 30분이 빈다. 도서관 대각선 쪽 공원 벤치에 앉아 졸고 있는 요구르트 아줌마가 보인다. 몇 년째 그 자리다. 요플레 두 개를 사서 조금 떨어진 그늘 벤치에 앉는다. 그래도 덥다. 뜨거운 낮이라 오가는 이 하나 없고 까치와 비둘기만 총총 걸어 다닌다. 


달짝지근한 블루베리와 시큼털털한 플레인 요플레를 한데 섞어 먹으며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니 내 뒤쪽으로 거리를 둔 벤치에서 할머니가 나를 유심히 본다. 해가 뜨거울 때인 데다 점심시간이라 늘 보이던  어르신들은 없다. 모른척하고 먹다가 또 돌아보니 여전히 나를 보고 있다. 이제는 나도 신경이 쓰인다, 왜 점심 식사시간에 혼자 있는 걸까. 독거노인인가. 90은 넘어 뵈는데 혹시 점심 먹는 걸  잊은 걸까. 엄마가 혼자 살 때 그랬던 것처럼.     


 문득 묻는다.  

할머니 점심 드셨어요? 하니 지금이 몇 시냐 되묻는다. 12시 30이라 하니 말이 없다. 다시 할머니 점심 드셨어요? 물으니 안 먹었다 말하고 왜 사람들이 없나 했더니 점심시간이라 없구먼 한다. 점심을 인지하고 계시니 다행이다. 요플레를 사드려도 되겠냐 여쭈니 싫다 한다. 혹시 예의상 하신 말씀일지도 몰라 다시 한번 여쭈니 싫다 하고 아까와 같이 무료한 표정으로 나를 계속 지켜볼 셈이다. 한 번 더 물을까 하다가 나도 간간히 지켜보기로 한다. 다행히 요양보호사인 듯한 분이 할머니에게 반색을 하며 말도 없이 여기 오면 어쩌냐 한다. 어쨌든 보호자가 있으니 나는 더 이상 안 지켜봐도 되겠다. 나 먹는데 집중이다.         

  

도서관은 확실히 시원하다. 그저께 빌린 책 마저 읽어 반납하고 신간도서하나 빌려 드럼학원에 가서 오른발과 오른손의 엇박자를 고치려 애쓴다.          


 4시에 노인주간보호 센터에서 돌아오는 엄마를 맞이한다. 송영차에서 내리는 엄마 표정이 불편해 보인다. 평소와 달리 운전기사에게 감사인사도 안 하고 산책은 마지못해 가자한다. 준비한 단백질 음료를 드리고 그늘진 산책로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관심사가 워낙 많아 걸음걸음이 더디지만 백 걸음 만에 시원한 공원 벤치에 앉았다. 


한쪽 어깨가 비스듬히 내려앉은 할아버지가 오늘도 혀를 낼름낼름하면서 지나간다. 버릇인가 볼 때마다 그렇다. 숱 없는 파마머리를 올백으로 빗어 넘긴 할머니는 굽어진 허리를 유모차에 기대어 걷는다. 30년 전 잠깐 손주 돌보러 왔다가 눌러앉았는데 아파트에 사니 외롭다던  전라도 할머니다. 고향사람 만나 좋다고 엄마와 손 마주 잡고 진도아리랑을 불렀던 기억이 없는 걸까 엄마도 그 할머니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엄마가 저녁 다 드신 거 확인하고 민요 틀어놓고 퍼즐 놀이 준비해 드리고 엄마를 언니에게 인계하고 나왔다.          

남편과 알콩 올리를 데리고 산책. 지나갈 때마다 왕왕대는 월시코기 집이 가까워지자 올리도 으르렁할 준비를 한다. 그 집 마당에서는 노부부가  늦은 시간에 마늘을 손질하고 있다. 판매하느냐 물어 한 접을 사서 돌아온다. 안 그래도 남쪽에서 주문하려 검색하고 있었는데 잘됐다. 탄소발자국을 줄인듯해서.     


아직 저녁을 먹지는 못했다. 하루가 길다.     

어떠신가요. 오늘하루 편안하신가요?

매거진의 이전글 은퇴 후 드럼을 배운 지 6개월 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