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인사를 드리러 부여에 있는 시댁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들른 화성리마을 커피 대장간 기다림 카페.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조용한 산골 마을에 서촌에서나 봄직한 그럴듯한 카페가 있어 들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카페 입구에 설치해 놓은 주황색 타프 아래서 먼 곳을 바라보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자연에 안기는 듯합니다.
굴곡진 작은 능선들이 완만하게 땅으로 드리우고 반듯하게 나뉜 논배미마다 남실거리는 벼가 전부인 평화로운 마을.
눈을 돌리니 연녹색 밤송이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밤나무 그늘 아래 눈을 질끈 감고 모로 누워있는 어미 고양이와 앞발을 어미 배에 얹고 젖을 빨고 있는 어린 고양이가 인기척에 놀라 동시에 고개 들어 힐끗 쳐다보곤 별일 없다는 듯 다시 제자리입니다.
오는 길에 휴게소에서 먹은 닭칼국수의 밍밍함이 메스껍기도 했지만 망하기 딱 좋은 카페 오지에서 영업을 하고 있으니 호기심에 아니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들어서자 편안한 클래식 선율이 찰랑거리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목덜미를 스칩니다. 하얀 피부에 수더분한 인상의 여인이 미소 지으며 무엇을 드시겠냐 묻습니다. 메뉴는 인삼라테 오미자차 아메리카노뿐.
인삼라테를 주문해서 마시며 통창 너머로 보이는 늘어진 가지에 밤송이와 시선아래 펼쳐진 벼이삭들을 보며 엉켜있던 생각들을 가닥가닥 풀어내고 있는데, 오소리 농장에서 직접 키워 로스팅한 원두를 갈아 내린 아메리카노라며 얼음 띄워 권합니다.
주문하지 않았다 하니 어차피 모두 무료랍니다.
그러고 보니 한편에 ‘우리 마을 카페 열었슈~ 여러분들 카페유~ 많이 누리셔유~‘라고 씐 펼침막이 걸려있습니다.
누구에게나 허락된 곳이고 마을 사랑방이니 편히 쉬다 가라는 여인의 말에 이제야 의문이 풀립니다.
판매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니 이 외딴곳에 있는 거고 메뉴는 3개였던 겁니다. 아메리카노 맛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지금껏 마신 아메리카노 삼천육백칠십 잔 중에 최고의 맛인 데다 제 수고와 교환되지 않은 그저 받은 호의라는 데 순간 당황했습니다. 이곳은 저와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듯합니다.
수삼은 한 주민이 구입해서 기부한 거고 오미자는 주민 누군가가 지난해 말려서 보관해 둔 걸 풀어놓은 거고 원두는 오소리 농장에서 분양받은 커피나무 한그루 가진 이가 기꺼이 내어 놓은 겁니다.
그리고 문득 문이 열리고 50대로 보이는 딸기농장을 한다는 주민이 미숫가루 한통을 내밀며 메뉴에 넣으라 합니다.
20가지가 넘는 재료를 모아 꿀을 넣어 단맛을 냈다는 미숫가루를 건네며 모든 재료를 직접 키우고 손질했다며 하얀 피부의 여인과 남은 수다를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잡념 없는 표정을 읽습니다.
그래서 이 카페 메뉴는 그때그때 바뀔 예정이랍니다, 마을 주민 누군가가 고구마를 수확해서 가져온다면 고구마라테를 더덕을 가져오면 더덕라테를, 그 재료들이 바닥날 때까지 누구나 이 음악 속에서 멀리 있는 풍경을 끌어안으며 앉아있을 수 있답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궁금하던 차에 또 듣게 됐습니다.
교직을 은퇴하고 귀촌한 주민과 이 마을 목사님이 4달에 걸쳐 유튜브에서 집 짓기를 배워가며 맨땅에 이 공간을 만들고 이렇게 운영하기로 했다고요.
다음 달부터는 한 달에 한번 마을 어르신들 모시고 이 카페에서 영화를 보려 한다고 합니다. 산자락에 자리한 30여 가구 80여 명 주민의 평균연령은 75세 언저리인 이곳에서. 많은 이가 도시로 빠져나간 이 산골에 누군가의 수고들이 모여 활기를 찾아가는 듯해서 여행객인 저 또한 설렜고, 언뜻 서로의 정에 기대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린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이 떠올랐습니다.
수고로움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에 익숙한 저로서는 이 은퇴자와 목회자의 삶 앞에서 머리가 숙여집니다.
당신은 어떤 은퇴생활을 꿈꾸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