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준호는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오다가, 원룸 건물 1층 현관 앞 우편함에서 삐죽 고개를 든 하얀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갑자기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아, 벌써 재계약 때가 되었구나... 이런, 샤갈..'
어제 비가 내려서 깔아 논 현관 앞 초록 카펫은 축축이 젖어있었고, 복도에선 늘 그렇듯 눅눅한 시멘트 냄새가 떠다녔다. 우편함 안엔 빨래방 할인 쿠폰과 피트니스 광고 전단지와 카드사 안내문 그리고 ‘계약갱신 안내’라는 임대인 이름이 적힌 편지 봉투가 들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열어 보진 않았지만 벌써부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는 궁금한 마음에 얼른 자신의 방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방 문을 열자마자 습한 공기가 호흡기로 들어왔다. 밤새 꺼두었던 보일러 때문인지, 부푼 벽지의 얼룩이 더 선명해 보였다.
준호는 외투도 벗지 않고 책상 위에 봉투를 펼쳤다.
‘월세 55 → 65(만원). 관리비 별도. 계약기간 1년.’
내용은 딱 그 한 줄 뿐이었다.
숫자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그 앞자리 숫자를 보는 순간 방 전체가 갑자기 더 비좁아 보였다.
낡은 형광등은 때맞춰 깜빡거렸고, 창문 너머 회색 벽은 숨 막히게 가깝게 서있었다.
준호는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에, 엄지손가락이 파르르 떨려 잠시 망설였다.
‘싸워봤자 뭐가 달라질까?’
그 생각이 먼저 올라왔지만, 동시에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라는 다른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전화가 연결되자 '여보세요'를 하기도 전에 퇴역군인 같이 낮게 갈라진 집주인의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아, 준호 씨. 봤지?”
“네… 사장님. 근데 이게… 10만 원을 한 번에 올리시는 건... 좀 부담스러워서요.”
준호는 최대한 차분히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수화기 너머로 힘겹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사정은 알겠지만은, 나도 어쩔 수 없어. 요즘 금리 알지? 이자 나가는 거 장난 아니야. 물가도 너무 오르고. 나도 힘들어. 원룸 몇 개 돌려서 남는 거도 없다고. 병원비도 안 나와. 그리고 주변에 다 올렸어. 안 올리면 나만 욕먹어.”
“근데 전월세 상한… 5% 그거 있잖아요. 갱신청구권 쓰면…”
준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집주인이 바로 말을 끊었다.
“갱신청구권은 세입자가 행사하는 거고, 이미 2년 살았잖아. 보통 한 번 썼다고 생각하면 되고. 그 지랄 같은 갱신청구권 때문에 다들 복잡해졌어. 누굴 위한 법인지.. 참내. 그리고 관리비는 상한이랑 별개야. 관리비를 더 올리면 끝이야. 다들 그렇게 해.”
준호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럴듯한 법이 있어도 실제 삶에선 그 법이 먹히진 않는다. 어떻게든 갑이 유리하게 빠져나가는 요령도 생겨나고 을이 막무간에로 버티는 요령도 생겨나기 때문이다. 갑과 을을 모두 옥죄는 이상한 법은 도대체 어디서 왔단 말이니가? 아, 난 "지금 여기’에 갇혀 헤어 나올 수가 없구나.’
그는 한숨 썩인 목소리로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럼… 협의는 가능하세요? 제가 지금 이사비용도 부담이라서요…”
“준호 씨, 나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 아니야. 근데 현실적으로 65가 최저야. 다른덴 평균 70 이상이야. 싫다면 딴 사람이 금방 들어와. 요즘 강남 접근성 있는 원룸 귀한 거 알지?”
“여기가 강남 접근성…?”
준호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아... 알겠습니다.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래, 빨리 결정해. 요즘 전세사기 때문에 방 구하기 쉽지 않을걸.”
통화는 바로 끊겼다.
준호는 폰을 내려놓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딴 공간에 머물다 돌아온 것처럼 방 안의 소리들이 갑자기 크게 울려 퍼졌다.
노트북 돌아가는 팬소리, 냉장고 모터 소리, 환풍기에서 덜덜거리며 나는 먼지 낀 바람소리, 밖에서 지나가는 오토바이 배기음, 신경경질적인 자동차 경적 소리, 어디선가 들리는 강아지 울음소리 그리고 옆집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까지.
‘이 방이 내 인생의 디폴트가 되면 어떡하지.’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민수에게서 카톡이 왔다.
‘야… 우리 단지 재개발 설명회 공지 떴다. 다들 “와 새 아파트” 하는데, 난 솔직히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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