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쉬고 싶었다. 쉴 수 없는 이유는 많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연말까지 못 쉬어. 특별한 계획 없이 갑자기 3주 휴가를 썼다. 그렇게 됐다. 그냥 아무도 안 만나고 집에서 책이나 보련다. 휴가 첫날 야심 차게 책장 정리를 시작했다. 책을 모조리 꺼내고 책 뒤에 쌓인 먼지와 고양이털을 닦았다. 꺼낸 책 중에서 더 이상 읽을 가능성이 없고 소유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 책을 구분했다. 옆방에 사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작업을 요청했다. 속아낸 책 중에서 알라딘에서 중고가로 매입하는 책을 다시 분류했다. 남은 책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주변 지인에게 나눔 했다. 최종으로 남은 책은 묶어서 버렸다. 총 150권 정도의 책이 이 집을 떠났다.
요 며칠간 책을 만지고 정리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인스타그램 헤비유저, 그것도 인스타스토리 헤비유저다. 집에 처박혀 한 일이라곤 책 들여다본 것뿐인지라, 스토리에도 정리 중인 책 사진을 올렸다. '아 허세처럼 보이려나. 나 책 좀 읽어, 잘난 체 하는 것처럼 보이려나.' 아주 잠깐 고민했다. 술 먹는 사진, 여행 간 사진, 드라마 보는 사진을 올릴 때는 하지 않았던 생각이다. 책이라는 건 왠지 남사스럽다. 누군가 취미가 뭐냐고 물었을 때, 왠지 진정성을 증명해야 할 것 같은 취미 그것은 독서.
책, 재밌으니까 읽는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읽는다. 드라마, 영화, 공연을 보는 거랑 비슷하다. 드라마나 영화는 자신들이 정해둔 속도가 있지만 책은 내가 원하는 속도로 읽을 수 있다. 가끔은 집에서 나서서 공연장까지 가는 길이 참 귀찮은데, 책은 침대 옆 책장에 손만 뻗으면 된다. 쉽다. 게으른 나에게 무언가 요구하지 않는다. 자극적인 소리와 영상으로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 주도권이 나에게 있다. 그냥 재미있어서 읽었는데,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회사에서의 업무에서, 가끔씩 도움이 된다. 책 읽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나에 대한 무언가를(?) 인정해 주는 듯하다. 참 여러모로 긍정적인 취미다.
“넌 책도 안 읽냐", "책 좀 읽어라"라는 말은 곧 "넌 왜 그리 무식하냐"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책 읽기를 강조하는 지엄한 말들은 어디나 넘쳐난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 은 책 읽기를 숙제처럼 여긴다. 따분하고 하기 싫지만 교양을 위해 억지로 해야 하는 숙제.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작가이자 평생을 도서관지기로 살았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했다. "난 의무적인 독서는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의무적인 독서 보다는 차라리 의무적인 사랑이나 의무적인 행복에 대해 얘기하 는 게 나을 거예요.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해요."
- 김하나 작가의 어느 에세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