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면서 딱히 스트레스받지 않는다. 회사 때문에 화병이 나서 정신과를 다녔던 선배나 자궁에 혹이 생겨 내과를 다녔던 친구에 비하면 나는 너무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작년 말 어떤 일 하나로 회사 생활이 힘들었지만, 몸이 아픈 정도가 아니니까 그냥저냥 회사를 다녔다. 그 한 가지 일의 여파로 만들어진 다음 일, 그다음 일을 하며 반기를 보냈다. 어느 날 일찍 출근해서 저녁 프로그램 운영으로 늦게 퇴근한 날이었다. 엄청 피곤한데 잠이 들면 다음날이 너무 빨리 오니까, 집에서 3-4시간 정도 이것저것 하다 잠이 든 것 같은데, 다음 날 일어나니 전날 집에 와서 무얼 하다 잠들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났다. 화병이나 자궁 혹에 비하면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 양호한 상태지만, 회사를 가기 싫어졌다. 다짜고짜 다음 주부터 쉬겠다고 했다. 이걸 받아주다니 우리 팀은 참 대단해.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뭐 할지 결정한다. 아주 긴 장마기간에 쓴 3주간의 휴가. 잠깐잠깐 해가 날 때는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에 비가 온다. 다행이다. 비 핑계를 대며 대단한 일로 휴가를 보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는다. 보통은 넷플릭스에 찜해두고 보지 않은 영화, 읽히지 않은 채 책장에 꽂혀 있었던 책을 뒤적거리며 오전을 보낸다. 그러다가 예매 사실을 깜빡 잊은 뮤지컬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오래간만에 외출을 나간다. 병원이나 마사지 샵을 예약한 후 겸사겸사 주변 미술관에도 다녀온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에는 고양이와 누가 더 오래 누워있나 경쟁을 한다. 아, 돈 있는(많지는 않고 있기만 한) 백수란 이런 건가 봐.
이제 전날에 무엇을 했는지 기억난다. 읽었던 책에 대해 기록해 두고 싶다는 생각을, 생각만, 하다가 아무것도 쓰지 않고 누워자도 어제 읽은 책이 기억나 다시 곱씹을 수 있다. 복귀해야 할 때인가. 휴가가 거의 끝나간다. 역시 내 체질은 집순이가 맞음을 확인한 휴가. 대부분 집, 그나마 나가도 보문동, 조금 더 나가서 종로구였는데, 다시 출퇴근의 삶으로 돌아가 성동구를 왕복해야한다. 내 체질을 거슬러야 가끔이라도 돈 있는 백수 행세를 할 수 있다.
세상에 완벽한 회사는 없다. 모든 구성원이 모든 부분에서 100프로 만족하는 회사가 있다면 그건 세뇌당한 종교집단일 것이다. 아무튼 내가 다니는 회사는 좋은 부분이 더 많은 회사다. 대부분의 일이 그럭저럭 할만하고 아주 가끔 힘든데, 힘들때는 회복을 기다려주는 회사다. 집 근처에서 잠깐 커피를 마시고 간 친구가 "회사가 그렇게 해 줘?"라고 물었다. 나는 "내가 그만두는 것보다 쉬고 오는 게 회사 입장에서 낫지 않을까.." 라고 대답했다. 한편으로 화병도 자궁혹도 이 정도의 힘듦일 때 조치를 했더라면 선배랑 친구도 안 아프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