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지난 영화가 아니기에, 그 사변도 여전히 의미 있는.
시간은 사회적이다. 태양이 떠오르거나, 감춰진 달이 모습을 드러내거나, 사체가 썩거나, 생명이 성장하는 것은 자연적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시간은 아니다. 시간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다. 시간에 대한 정의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치란 무엇인가? 사회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 책은 무엇인가? 인터넷은 무엇인가? 키보드는 무엇인가? 노트북은 무엇인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은, 정의하기 어렵다. 사랑이 그러하고, 슬픔이 그러하고, 기쁨이 그러하다. 시간도 그러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잡화점>>)은 시간을 다룬다. 시간이 없었다면, 소설은 전개될 수 없었다. 여기서 시간은 흘러가지 않는다. 시간은 현실을 뒤바꾼다. 이는 우리의 수평적 시간관을 해체한다. 시간을 다루는 작품은, 과거를 바라보거나, 미래로 뻗어나간다. 혹은 현재를 살아간다. 역사 소설이나 시대극은 모두 과거를 다루는 이야기다. <스타워즈>나 포스트-아포칼립스, 디스토피아는 미래를 다루는 이야기다. <미생>, <오징어 게임>, <기생충> 그 외의 현대문학은 현재의 이야기다. 하지만, 세 범주를 넘나드는 작품들이 존재한다.
앞서 언급한 <<잡화점>>은 과거와 현재가 소개팅 이후 재회하는 이야기다. 어색한 만남이지만, 풋풋하면서도 신선하고, 서로에게 이끌리면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하지만 그 끝에는 헤어짐이 존재하는. <인터스텔라>는 미래가 양육하는 현재의 이야기다. 자신이 흐름을 알기에 자식을 ‘머물게’ 하려는 미래의 부모와 그에 대한 동일자이면서도 타자인 현재의 자녀가 끈 사이를 헤집으면서 결국에는 어디론가 향하는. <너의 이름은>은 <<잡화점>>과 <인터스텔라>의 결혼식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와 현재의 결혼식에서, 미래는 주례를 본다. 미래는 묻는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합니까? 과거와 현재는 자신 있게 “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주례사의 연륜. “서로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 순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센>)이 큰 소리로 외친다: 이 결혼 반대합니다! <너의 이름은>은 <<잡화점>>의 과거-현재 소통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인터스텔라>의 미래-현재 변동 가능성을 그 소통에 삽입한다. 여기서 우리를 눈물짓게 만드는 것은 <센>이 겹치어지는 듯한, 이름 쫓음의 레이스이다.
안녕하세요? 아침노을입니다. 이름은 우리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물론, 유명인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름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것은 ‘그래서?’ 이외의 반응을 유도하기 힘들다. 초면에 마주하는 이름 교환식은 아비투스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아비투스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불멸에의 의욕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유명인이 찍어 놓은 발자국은 흙에 새긴 발자국과 다르다. 후자가 자연 앞에 굴복한다면, 전자는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한 듯 보인다. 짱구 아빠의 발 냄새가 애잔함을 불러일으킨다면, 금색의 발 냄새는 피로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도 그들처럼 되어야 한다거나 그들을 선망해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들처럼 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이름이다. 우리의 외관 혹은 내면이 바뀐다 해도 이름은 바뀌지 않는다. 영원성의 보존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역으로, 과거의 나와 결별하고 싶다면 ‘개명’할 수 있다. 나아가, 영원성을 보존할 수 있는 행위성의 상실은 누군가를 ‘무명’인으로 만든다. 이름은 한 가지를 알려주게 된다. 누군가의 존재.
<너의 이름은>은 누군가의 존재를 말한다. 제목부터 작중 대사까지 그 존재를 찾기 위해 두 주인공은 끊임없이 달리거나, 외치거나, 주무른다. 여기서 전통적인 수사극이나 추리극의 전제가 깨진다. 박찬욱의 복수 3부작(<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이나 <끝까지 간다>, <악마를 보았다>, <플란다스의 개> 등이 전제로 하는 시간의 공유가 깨진다. 관객조차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선형적 시간관에는 구멍이 생겼다. 혜성의 흔적을 닮은. 물론, 선형적 시간관이 깨진 영화들은 많다. 이창동의 <박하사탕>은 과거로의 회귀를 연도까지 포함하여 굉장히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포레스트 검프>는 자기 이야기를 대놓고 하면서 내 옛날얘기로의 여정을 시작한다. 하지만 <너의 이름은>은 과거와 현재의 소통이 있다는 점에서 여타 작품과 다르다. 즉, 시간을 뒤흔드는 것이다.
우리의 상상을 박살 내는 파상은 영화를 관통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전반부에서는 일상의 안정성에 대한 파상을, 중반부에서는 시간의 수평성에 대한 파상을, 종반부에서는 다시 일상의 안정성에 대한 파상이 작동한다. 여기서 염두에 둬야 할 점은, 전반부의 파상이 주인공 두 명에게 집중된다면, 종반부의 파상은 주인공 두 명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 퍼지는 듯한 전염을 보인다는 점이다. 대칭성에 대한 파상까지도 존재한다. 그리고 작품 전체를 통틀어, ‘나’에 대한 파상이 작동한다. 나는 나인가? 누구인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근본적 변혁에서 온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혁명 영화라고 부르는 데 손색이 없다.
여기에 더해 영화는, ‘운명’을 삽입함으로써 타임 패러독스나 SF가 뿌려놓은 덫을 사뿐히 즈려 밟는다. 이승과 저승, 제사와 의식, 붉은-실과 같은 비합리적 요소들은 영화의 예측 불가능성을 배가한다. 테일러가 만들어낸 확실성에 대한 숭배라든가,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라든가, 안정성에 긍정성을 결합한 아이러니한 시대 풍조는, 예측 불가능성을 신선한 충격으로 느끼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공포영화나 매운맛, 놀이공원에 환장하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지 못한 예측 불가능성의 보고(寶庫)들이니까. 베버의 탈-주술화가 탈피되는 지점이랄까? (아쉬운 점은, 이동진도 지적했듯 둘의 만남이 성사될 것이라는 결론의 스포일러. 따뜻한 그림체, 청춘의 제목, 풋풋한 소년/소녀와 일본의 감성까지, 스포일러를 안 당할 레야 안 당할 수 없는 구조이다.)
과거와 현재의 결혼식에서, <센>의 난입은 청중을 어지렵혔다. 하지만, 이내 신부의 면사포에 감춰진 붉은 실이 드러난다. 주례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이름은 오늘부터 알아가면 됩니다. 우리에게 이름을 찾아야 할 의미는 있으니까요." <센>이 한 사람에 대한 격동을 다룬다는 것은, 언뜻 보면 <너의 이름은>과의 차이점을 형성하는 지점 같다. 하지만, <너의 이름은>을 비유로 본다면, 우리에게는 다양한 면이 존재한다는 뜻일지 모른다. 즉, 우리가 찾으려는 이름은 실제의 타자일 수도 있지만, 내면의 자아일 수도 있다. 영화를 비유로 볼지, 직설로 볼지는 물론, 청중의 자유이다. 청중의 일원인 나는 경계를 허물 자유를 쟁취하려 한다. 우리는 타자를 추방할 필요도, 자아를 스토킹 할 필요도 없으니까 말이다.
황혼에 보고, 새벽에 쓰고 있는 이 글에는 무엇이 찾아올까. 단지 이 글이 독자를 앞지르지 않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