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세계여행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금 Apr 03. 2022

소설 속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피렌체/이탈리아) '냉정과 열정사이' 소설 속으로 떠난 여행



(피렌체/이탈리아)



기차가 역에 멈춰 섰다.

피렌체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 여름의 소나기처럼

이렇게 퍼붓듯 쏟아지는 비는

여행을 떠나온 뒤로 처음이었다.


3단 우산을 써도

배낭이 흠뻑 젖을 것 같아 난감했지만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나는 왠지 싫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내려놓고

젖은 옷을 갈아입은 뒤

다시 거리로 나섰다.


그냥 좀 더 걷고 싶었다

비 오는 날의 피렌체 거리를.


비를 맞아 건물들 색깔이 진해졌다.

거리가 선명해진 기분이었다.




긴-여행을

이탈리아에서 시작하게 된 이유는 책 한 권.


무슨 책일지

이미 짐작한 사람도 있으리라.


나말고도 이미 많은 사람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태워보낸 책

<냉정과 열정사이>다.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는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두 남녀

아오이와 준세이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오래전에 헤어진 두 사람.

서로 다른 상대를 만나 연애하고 있지만

여전히 마음 한편에 서로가 남아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래된 약속이 하나 있다

서른 살 생일에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나자는.




내가 기억하기로는 열여덟이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던 때가.


다 읽은 책을

읽고 또 읽는 동안


나이를 가리키는 숫자

앞자리가 2로 바뀌었다.


책을 읽을 때마다

머릿속으로 늘 상상했었다.


두 사람이 오르기로 약속한

세계에서 가장 멋지다는 두오모를.


그리고 두오모에서 내려다본

도시 피렌체를.








'그런 피렌체를. 내가 지금 걷고 있다니!'








아스팔트 대신

돌이 깔려있는 바닥은

자꾸만 나를 걷고 싶게 만들었다.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 해질 때까지

나는 한참을 더 걸었다.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 중에서



-약속할 수 있니?

-무슨?


-내 서른 살 생일날,

  피렌체의 두오모 쿠폴라 위에서 만나기로, 어때?


-피렌체의 두오모? 왜 그런 곳에서?

  밀라노의 두오모는 안돼?


-밀라노 쪽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오모이고,

   피렌체 쪽은 세계에서 가장 멋진 두오모라고

   페데리카가 말했어.


-또 페데리카로구나.


-땀을 흘리며 몇 백 계단을 필사적으로 오르면,

  기다리고 있을 피렌체의 아름다운 중세 거리 풍경에는    

  연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는 미덕이 있다고 했어.


-그렇다고 딱히 거기서 만날 약속은 안 해도 되잖아.

   서른 살 네 생일 때 우리 같이 가도록 해.

-응, 우리가 헤어지지 않는다면.








우피치 미술관에 가면

미술 복원가로 일하던 준세이의 모습이 떠올랐고


베키오 다리 옆에서 산책을 할 때는

준셰이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것만 같았다.


피렌체 이 골목의 방 어딘가에서

준세이가 복원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소설 속으로 들어온

비현실적인 느낌이랄까.


그 어느 곳에서도

소설 속 장면들이 떠오르는 도시 피렌체는

나에게 한 권의 책, 그 자체였다.






연일 내리던 비가 그치고

오래간만에 맑은 날이 찾아왔다.


'오늘은 두오모에 오르자'


광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두오모에 오르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한 발 늦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을 보니

한숨이 나왔지만 별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내일은 다시 비가 내릴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티켓을 구입하고 줄을 섰다.


몇 시간쯤 기다렸을까.

슬슬 배가 고파오고, 다리가 아파올 때쯤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성당 안에 들어서자

갑자기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정해진 퇴장시간이 있는 것도 아닌데

흘러가는 순간들이

벌써 아쉽게 느껴졌다.


내부는 상상했던 것보다

화려한 분위기였다.


성당 내부를 둘러보면서

정해진 통로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만났다.

두오모의 계단을!




가장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늘 이 계단이 궁금했다.


모습, 냄새, 촉감, 소리, 온도, 습도, 빛

작은 것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준셰이라면,

이 계단을 오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아오이라면,

이 계단을 오르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준셰이가 된 듯

아오이가 된 듯


떨리는 마음으로

계단을 밟았다.


내 생에

가장 정성스럽게

밟아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마지막 발을 내딛는 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강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눈앞에 아름다운 장관이 펼쳐졌다.


피렌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경은

책에서 읽었던 그대로였고

상상했던 것보다 아름다웠다.







그 순간 두오모함께있던

다른 이들은 그곳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 중에서



정상이 가까워지자

신선한 바깥바람 냄새가 났다.


한 계단씩 하늘로 다가간다.

하늘로 그리고 과거로.

미래는 이 과거의 끝에서나 찾을 수 있다.


조그맣게 숨을 들이쉬고,

나는 정상에 올라섰다. 빛 속으로.


평화롭고 조용한 피렌체 거리의

저녁 하늘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적갈색 지붕들.

빽빽한 , 거의 빈틈없는.



'아아, 시원한 바람'


나는 바람에게로 얼굴을 내밀 듯 음미하였다.

피렌체의, 두오모 정상으로 부는 바람을.


모두들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털썩 다리를 쭉 뻗고 앉아,

기둥에 기대어,

혹은 책을 베개 삼고 누워.


대리석 기둥에는 여기저기 낙서가 적혀 있었다.

날짜, 이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

나는 그것을 보고 미소 짓는 자신을 느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 벽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적갈색 지붕들 너머, 저 멀리로 완만한 구릉이 보인다.

교회의 첨탑,

빨래가 널려 있는 창. 

올라온 계단의 정 반대쪽, 

도시의 반대편이 내려다보이는 장소까지 걸어갔을 때,

내 눈이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사람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약간 비스듬하게

그러나 거의 등이 똑바로 보이는 위치에서,

나는 그 사람이 쥰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behind 


저녁이 되면서 비는 점점 잦아들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맑은 날씨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피렌체



내 생에 가장 정성스럽게 밟아올라간 계단

그리고 마침내 만난, 두오모에서 내려다본 피렌체의 풍경





매거진의 이전글 운동화 끈을 풀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