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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세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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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 Apr 27. 2022

그래 알겠어. 각자 갈 길 가자

(아테네/그리스) 그녀가 걱정됐지만 선뜻 같이가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테네/그리스)


한국을 떠나온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간다.


한국에서의 일상은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매일 낯선 곳에서 잠드는 일이

나의 새로운 일상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10년 훌쩍 넘게 지낸 집.

매일 지겹도록 오가는 학교.

흑역사를 줄줄이 꿰고 있는 오랜 친구들의 자리를


반신반의 고른 별 다섯 개짜리 낯선 호스텔.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이국적인 풍경의 여행지.

오늘 처음 만난. 새로 사귄 친구들이 대신했다.



장기 여행자의 일상은

익숙함 대신 새로움으로 채워졌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익숙함이 사라지는 만큼

편안함도 줄어들고


새로움이 찾아오는 만큼

낯섦과 긴장도 함께 찾아온다는 것을.






(아테네 /그리스)


'이건 뭐 어떻게 읽는 거야..'

'내가 그리스어를 들어본 적 있었나'


어떤 소리가 날지

전혀 감도 잡히지 않는

낯선 문자들로 적힌 안내표지판들을 보니


새삼. 전혀 모르는 낯선 세상에

발을 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이드북을 보고 찾아간 숙소는

아네테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졌다는 호스텔이었다.


가격이 저렴한 편은 아니었지만

광장에서 거리가 가깝고

밝고 감각적인 인테리어도 마음에 들었다.


호텔처럼 카드키를 접촉해야

방문이 열리는 점도 좋았다.


카드키를 자꾸만 두고 나오는 바람에

나중에는 좀 귀찮기도 했지만.





체크인을 하고

카드를 받아 방으로 올라갔다.


띠-스스륵.


카드를 갖다 대자

밝은 오렌지 컬러 문이 열렸다.





'어! 여기 2층이구나. 잠깐만 짐 치워줄게'


배낭을 메고 들어선 나와 눈이 마주친

바닥에 쭈그려 앉아있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단번에 내 자리를 아는 것을 보니

방에 비어있는 침대가 하나뿐인 모양이었다.


뭘 찾는 중이었는지

바닥에는 캐리어와 짐들이

정신없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2층 침대 사다리를 사용할 수 있도록

그녀는 짐을 한쪽으로 밀어주었다.


"뭐가 없어졌니?"


배낭을 내려놓으며 내가 물었다.


"응? 아니. 캐리어 두 개를 가득 채워왔는데

아무리 뒤져도 입을만한 게 없네"




내가 배낭을 풀어

사물함에 짐을 정리해 넣는 동안


그녀는 반대로

연신 캐리어에 있는 짐을 끄집어냈다.


마땅히 입을 만한 옷이 없어서

캐리어를 뒤지고 있다는

그녀는 인도 출신 미국인이라고 했다.


인도와 미국 사이에서

무슨 일을 한다며 열심히 설명했는데

나는 그녀의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혼자 배낭여행을 하다 보면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된다.


정해진 룰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화상대만 바뀔뿐

오가는 대화는 늘 비슷하다.



이름이 뭐니?

어느 나라에서 왔니?

여행을 떠나온 지 얼마나 됐니?

학생이니?무슨일 하니?

여기 오기 전에 어디를 여행했니?

여기서는 어디를 가볼꺼니?



이번에도 어김없이

방금 만난 그녀와 비슷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그녀의 이름, 직업, 국적을 안다.

그녀의 여행에 대해서도 안다.


그럼 이제 그녀는 아는 사람일까?

아니면 여전히 낯선 사람일까?


여행을 하면서 만나고

함께 어울려 시간을 보낸 사람들 중에

어디까지가 친구의 범주에 들어갈까?

이들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의식의 흐름을 따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의 행렬도. 정리도.


거의 끝나갈 때 즈음

그녀가 말했다.



"오늘 밤에 약속 있니?"






아테네의 밤.


길거리와 노천식당에

하나 둘 조명이 켜지더니


산꼭대기 올려다보이는

파르테논 신전에도 조명이 들어왔다.


해가 넘어가면서 갈수록 진해지는 하늘과

사람들과 내가 발을 딛고 있는 땅

그 중간에 자리잡고 있는 신전.


아테네 시내를 내려다보는 듯한 신전에서는

웅장함, 우아함, 숭고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뜨거운 열기만이 가득했던

텅 비어있던 거리에는


액세서리를 파는 노점상들과

구경하는 연인들이 모여들었다.


어둑어둑 해가 저물어갈수록

아테네는 기지개를 켜고 깨어났다.




저녁 약속 시간에 맞춰

숙소 루프탑에 도착했을 땐

공간에 이미 취기가 가득했다.


적당히 기분 좋은 온도와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에


적당히 어두워서 편안한 조명과

센스 있는 알바가 선곡한 음악이 더해지니


무슨 흥미진진한 일이라도 생길

특별한 밤처럼 느껴졌다.


아테네의 전경을 안주삼아

맥주를 들이켰다.




"우리 이제 슬슬 출발할까?"





루프탑에서 내려온

나와 그녀는 광장을 지나서 더 걸었다.


멀리서 모여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한 손에 맥주를 들고 있는 남자들과

얼굴이 불그스름한 여자 둘.


취기와 들뜬 분위기를 보니

우리가 제대로 찾아온 것 같다.





"여기 클럽투어 맞아요?"






약속된 시간은 지났는데

버스가 오지 않았다.


'여기가 아닌거 아냐?'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을 때

대형 버스 한 대가 멈춰섰다.


창문에는 진한 선팅이 되어 있어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소란스럽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버스가 문을 열자

음악소리가 크게 울렸다.


한 사람씩 버스에 올라타며

통로를 지나갈 때마다

먼저 타고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공중에 손을 휘젓고

일어섰다가 옆자리 친구에게 넘어지고

곧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들고있던 맥주병을 떨어뜨리고

말 그대로 난리부르스였다.


우리가 난리부르스 이거나 말거나

버스는 출발했다.






첫 번째로 도착한 클럽은

버스 안에서의 난리부르스가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클럽은 클럽인데..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클럽이었다.


비치 클럽이란다.


고급스러움이 느껴지는 현대적인 건물.

전면 유리로 된 1층은 반쯤 오픈된 구조로

야외테라스로 이어져 있었다.


야외테라스로 나가는 입구에 있는

속이 비치는 흰 커튼이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하늘 흔들렸다.


앞에 바다가 있다는데

밤이 어두워 보이지는 않았다.



대충 둘러본 두에 중앙 바에 앉아

우리도 술을 한잔씩 주문했다.


"아니 무슨 클럽투어라며. 이게 뭐냐 이게"

"그러니까. 술 다 깬다"


알코올을 삼키는데

점점 정신이 차려지는 느낌.


미드에서나 봤던 근사한 이었지만

지금 우리가 있고 싶은 장소는 아니었다.


다행히 술이 완전히 깨버리기 전에

버스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근사하지만 별 감흥이 없는

또다른 클럽을 한 군데 더 거쳐

버스는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다.


건물 하나가 우뚝 서있고

그 앞에는 넓은 주차장이 펼쳐져있는 곳이었다.


넓은 주차장에는

차들이 빼곡히 세워져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일행들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둥글게 이어지는 복도가 나왔고


복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극장 문처럼 생긴 커다란 두 짝의 문이 나왔다.


활짝-





꼭 필요한 부분만 가린

이것도 비키니라고 쳐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은

아슬아슬한 차림으로 춤을 추고 있는

무대위 언니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입이 떡 벌어졌지만 곧 무덤덤해졌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야야야야야야야 놀자 가자 고고고"






한국을 떠나온 이후로

한밤중의 외출은 처음이었다.


낯선나라에서 여자 혼자 여행을 하다보면

단속하는 부모님 잔소리 없어도

저절로 귀가시간이 빨라지기 마련이다.

생존본능과 안전욕구랄까.



이 시간이 왜 이렇게 달콤하게 느껴지는 건지.

이 느낌이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


내가 그날 밤 클럽에서 느낀 것은

또 다른 의미의 자유였다.


잃어버린 나의 24시간 중

일부를 되찾은 느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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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잠깐! 바람! 쐬고! 오자!"


한참 신나게 놀다가

그녀가 바람을 쐬고 싶다는 말에 밖으로 나왔다.


밖은 여전히 조용했다.

음악이 울리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릴뿐

아무소리도 나지 않았다.


주변에 다른 건물도 보이지않았다.

외딴 곳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맨살에 차가운 공기가  닿자 닭살이 돋았다.



"이제 들어갈까? 추운데?"


"나 너무 피곤해.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우리 이제 가자"


"지금?숙소? 버스 출발하려면 아직 시간 좀 남았잖아"


"얼마가 남았든 어차피 더 놀지도 못하겠어. 그냥 가자"


"여기 어딘지는 알아? 어떻게 지금 어떻게 가"


"택시 불러달라고 하면 오겠지. 알아서 데려다줄 거고"


"좀 있으면 금방 해가 뜰텐데. 버스도 출발할꺼고 그때"







실랑이 하듯 말을 주고 받다가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짜증스럽게 아니 화가 난 투로 했다.

 

"그래 알았어. 각자 갈 길가자"







당황스러웠다.


여기가 어디쯤 인지도 모르겠는데.

이 새벽에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택시를 탄다고?


주변에 건물도 택시도 안보이고.

인적도 드문데. 아니 없는데?


버스 타고 몇 시간쯤 왔더라?

택시비도 장난 아닐 텐데.


버스가 출발하려면

이제 한 시간도 안 남았는데


방금까지 멀쩡하게 뛰어놀았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미심쩍은 마음도 들었다.





어디로 가는 건지

뭘 알고는 가는 건지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냥 저렇게 혼자 보내도 괜찮을까..'


그녀가 걱정됐지만

선뜻 같이 가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행지에서 불과 몇 시간전에 처음 만난

친구? 룸메이트? 아는 사람?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내가 너무 까칠하고 예민한걸까.






나는 다시 안으로 돌아왔다.

으슬으슬 몸이 떨렸다.


기분 탓일까.

음악도 사람들의 움직임도

왠지 템포가 느려진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신나지가 않았다.


움직임이 느려진 만큼

시간도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았다.





'같이 가줄걸 그랬나'





+ps


다음날 아침.


나는 녹초가 된 채로

타고갔던 버스를 타고 다시 돌아왔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1층 침대를 먼저 살폈다.

그녀가 안대를 끼고 잠들어 있었다.


다행이었다 여러모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씻을 기운도 없어서

나는 그대로 침대올라가 쓰러졌다.


잠에서 깼을 때는

점심때가 한참 지난 오후였다.


간밤에 마신 술로

여전히 속이 울렁거렸다.


그녀를 마주쳤지만

그녀는 기분이 단단히 상했는지

눈썹을 찡긋 하더니 새침하게 가버렸다.


피식 웃음이 났다.

속이 다시 울렁거렸다.

침대로 기어 올라가

누우며 생각했다.


이제 그녀는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스쳐간 사람?






한 편의 수채화 같은 그리스 아테네의 거리
해가 저물면 깨어나는 도시 그리스 아네테 밤거리
해가 저물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맥주를 마시면서 올려다보는 파르테논 신전
그녀와 내가 묵었던 호스텔. 그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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