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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사진사 Jul 12. 2023

기상오보

고양이의 마음

신발장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양말을 신고 하얀 운동화를 신었는데 아침에 본 기상예보가 생각났다. 오후 12시부터 3시 사이에 서울에 60에서 100mm의 폭우가 쏟아진다고 했다. 비를 맞는 건 좋은 쪽이지만, 옷이 아닌 양말을 신은 신발이 축축해지는 건 좋지 않은 쪽이다. 고민하다가 재빨리 옷을 갈아입는다. 반바지를 입고 양말도 벗었다. 아직은 서먹한 지인을 만나는 약속이지만, 짧은 옷에 슬리퍼를 신어도 반겨줄 사람들이다.


오랜만에 아침부터 지하철을 타고 인사동으로 향한다. 사실 어디를 가느냐도 설레지만, 누구를 만나느냐가 내 약속에 더 큰 기대를 준다. 비가 쏟아지는 인사동을 거닐 생각에 기분이 좋다.


근사한 곳으로 들어가 지인들과 커피를 앞에 놓고 수다를 떤다. 별거 아닌 소소한 이야기에 서로 공감하며 웃는다. 창밖을 지나는 사람들과 탁한 유리에 흐려진 골목 풍경이 오래된 영상의 한 장면인 듯 잔잔하게도 좋다.


그냥 자버렸으면 몰랐을 오늘 이 시간 이곳의 공기와 분위기, 그리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내게로 와서 분과 초를 지나며 추억으로 꾹꾹 눌러 담긴다. 나중에 떠올릴 오늘은 적당히 발효된 더 멋진 이야기로 남겠지. 나이가 들면서 흐려지는 기억력이 애매하거나 나쁜 기억마저 좋은 것만 남기고 털어내는 나만의 필터링으로 바뀌어 간다.


오후가 됐다. 비가 온다는 그 시각.


하늘은 아침보다 화창하며 피부에 와서 달라붙는 공기는 축축하다. 기상청이 또 거짓말을 했다. 양치기 소년보다 더한 대한민국 기상청. 갑자기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 머쓱해진다. 나는 무엇하나 바뀐 게 없는데 거짓 예보에 혼자 서운하다.


비가 오지 않아서 더 좋을 시간을 보낸다. 옷이나 신발 따위에 매몰되지 않을 마음가짐으로. 습한데 기온은 높으니 푹푹 찐다. 반바지를 입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슬리퍼를 신어서 시원하다고 마음먹자. 그렇게.


지인들과 안녕을 고하고도 서울을 크게 한 바퀴 돌아 집에 왔다. 저녁이 될 때까지 비 한 방울 떨어질 기색이 없다. 하늘은 가을에 봤음직한 색이다. 푸르고 높다. 나무는 울창하고 또 푸르다.


예보만 맞았음, 더 좋은 날이었을 텐데.


기상청만 빼고 좋았던 오늘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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