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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늠 Jun 13. 2023

엄마의 숏컷


 주말에 친정에 도착해 현관문을 여니 엄마가 소파에 앉아 나를 맞았다. 엄마의 머리 스타일이 바뀌어 있었다. 숏컷으로.  


 “엄마 머리 짧게 잘랐네?”


 말을 꺼내니 엄마가 울상을 지으며 말을 쏟아냈다. 머리를 다듬으러 갔는데 머리를 이따위로 잘라놓았다며, 함께 간 아들과 미용사를 욕했다. 흉보는 수준을 넘어선 육두문자의 욕설을 하며 귓가의 머리를 만지던 엄마는 이 머리를 어떻게 하냐며 울음을 터트렸다. 오빠에게 전화하여 엄마 머리를 왜 이리 짧게 깎았는지 물어보았다. 오빠는 엄마가 분명히 귀 위까지 올려 깎으라고 했다면서, 나중에 딴말할까 봐 녹음까지 했다고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초기 치매였던 엄마는 한 가지 상황에 몰두하여 같은 말,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미용실을 다녀온 후 며칠간 머리 얘기만 했을 상황이 그려졌다.


 엄마의 머리 스타일은 늘 중단발이었다. 뒷머리를 짧게 쳐올려도 옆머리는 꼭 귀를 덮었다. 엄마가 아기였을 때,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일본에 살았나 보다. 엄마는 외조모부의 첫아이였다. 일본에서 외할머니는 아기인 엄마를 안고 료칸에 갔다가 엄마를 욕탕에 빠트렸다. 육아에 서툴렀을 외할머니가 아기의 귓속에 들어간 물을 뺀다며 면봉으로 귓속을 만졌다. 이후 엄마는 듣지 못하는 아이가 되었다. 고막을 다쳐 왼쪽 청력을 상실했고, 오른쪽 청력이 약간 남아 보청기를 끼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요즘 보청기는 귀속에 파묻혀 피부색과 비슷한 블루투스 이어폰처럼 보이지만,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귀에 걸치는 보청기를 꼈다.


 엄마가 언제부터 보청기를 꼈는지는 모른다. 엄마의 어린 시절을 말해 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결혼적령기에 이른 엄마가 혼처를 고를 때, 엄마의 사정을 아는 집과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고 23살 겨울, 엄마는 아버지와 결혼했다. 사정을 알고 결혼한다는 의미가 ‘그럼에도’ 좋아서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내게 ‘엄마가 보청기를 낀다’는 건 ‘숨을 쉰다’, ‘밥을 먹는다’, ‘화장실을 간다’와 같은 의미였다. 엄마를 ‘귀머거리’, ‘병신’이라고 부른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엄마는 바람에 날리기라도 하면 다 보이는 커다란 보청기를 머리카락으로라도 가리고 싶어 했는데, 엄마가 감추고 싶어 했던 약점을 아버지는 자꾸 떠들고 다녔다.


 조선 시대에나 있을 법한 은장도를 갖고 있던 엄마는 평생의 반려자인 남편이 아내를 존중하지 않고, 폭력적인 남자라는 데 적응하지 못했다. 그런 엄마가 자신과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종교와 체념이었다. 회개를 해야 할 사람은 아버지였는데 열심히 미사에 참석하며 고해성사와 기도를 하는 쪽은 엄마였다.


 아버지의 염습, 입관 절차를 하는 동안 엄마가 대성통곡을 했다. 엄마가 우는 바람에 나도 눈물이 쏟아졌다. 장례를 마치고 친정집에 돌아와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냐고 내가 물었다. 죽은 사람이 불쌍했다는 말에 “아버지가 불쌍했다고?”라고 반문하니 이렇게 산 내 인생이 너무 서럽다는 말이 돌아왔다.


 어린 시절 얻은 장애를 두고 부인을 비하하는 못나고 어리석은 남편을 엄마는 끝내 교화(?) 하지 못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보지 않는 곳에서 아버지를 진저리 쳤지만, 끝까지 함께 살았다. 아들이 따로 살 공간을 마련해주기도 했지만, 엄마는 집으로 돌아갔다. 자식들에게 용돈 받는 걸 미안해했던 엄마는 가끔은 친절하기도 했던 아버지에게 굽히고 엄마 방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상황을 바꿀 힘, 아마도 경제력이 없다는 무력감이 엄마를 체념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가보았던 선산에 아버지를 묻고 삼우제를 지낸 날, 자식과 며느리들이 선산 아래의 볕이 비치는 공터에 모여 엄마의 거취를 의논했다. 잠은 집에서 자야 한다고, 요양원은 가지 않겠다는 엄마의 의견은 다수결에 묻혔다. 엄마에게 말을 전할 사람은 나로 정해졌다. 친정집에 돌아와 아버지 짐을 마저 정리하고, 저녁 즈음 소파 밑에 앉아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에게 요양원 얘기를 꺼내려니 괜히 입이 실룩거렸다. 낮에 삼우제가 끝나고 모여 엄마 얘기를 했다고 말하니 엄마가 날 쳐다보았다.


“엄마……. 내가 집에 가면 엄마 혼자서 어떻게 지낼 거야?”

“아줌마 오잖아. 괜찮아. 걱정하지 마.”

“근데, 엄마……. 난 걱정이 돼……. 다 걱정해……."


 요양원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눈물이 고이지도 않고 두두둑 떨어졌다. 다들 엄마가 요양원에서 지냈으면 한다고, 형제들이 모여 얘기한 걸 전했다. 엄마가 요양원에 갔으면 한다는 말만 했는데, 잠시 후 엄마가 “알았어.”라고 대답했다. 밑도 끝도 없이 우는 내 모습이 자식들이 정한 자신의 거취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알았어.’라고 말하게 한 것 같았다.


 “울지 마. 거기 가면 밥도 주고……. 옆집 아줌마도 요양원에 갔어.”라고 말하며 엄마가 볼륨을 낮춘 TV로 눈을 돌렸다.      


 요양원 입소는 열흘 후로 정해졌다. 그때까지 내가 함께 지내기로 했다.  엄마가 앉아서 성경을 읽고 일기를 쓰고, 머리를 빗던 책상을 정리했다. 뒷베란다를 정리하다 아버지의 패악을 잔뜩 적어놓은 엄마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읽다가 이건 내가 갖고 가겠다니 그러라고 한다. 오빠는 엄마가 생활할 요양원 소개와 내부 시설 사진을 프린트로 뽑아 파일로 만들어왔다. 엄마에게 보여주며 이제 여기에서 생활할 거라고 설명하고, 폴더 폰의 영상통화 기능도 알려줬다. 엄마의 요양원 입소날, 엄마를 오빠 차에 올려 앉히고 엄마 허리를 껴안고 배웅했다. 엄마가 떠난 후 텅 빈 친정집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는 집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러 나섰다.  

    


 

 그즈음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과제로 주어지는 이야기의 소재는 엄마가 아니었는데,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엄마가 되어 있었다. 그때 난 엄마가 옆에서 돌봐 줄 사람이 없으면 혼자 지내는 게 위험하다는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귀가 참 밝았던 아버지는 거실에서 엄마와 얘기를 나누면 안방에서 나와 말참견을 했다. 아버지 눈치가 보여 엄마와 맘껏 얘기하지 못했다. 엄마가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믿고 싶었다. 


 엄마와 둘이 지냈던 열흘 동안 엄마는 내 평생 처음 듣는 얘기를 많이 했다. 그 얘기들은 엄마의 기억력이 퇴행해도 잊히지 않는 사건일 것이다. 새롭게 알게 된 과거와 일기장에 적힌 이야기들을 읽으며 아버지를 만나 버티며 살아내려고 애쓴 엄마의 삶을 생각했다. 남사스러우니 집안일을 말하지 말라던 엄마를 생각했다. 엄청난 비밀도 아닌데, 말을 삼가느라 오해가 쌓여 이제 만날 수 없는 나의 원가족을 생각했다. 각자의 사정은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난 그때 왜 말하지 않았을까, 그때 왜 쓰지 않았을까 후회하고 싶지 않다. 그때 왜 썼을까 후회하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하지 않아서 후회되는 일이 너무 많아 차라리 하고 후회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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