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공기가 잠깐 물러가더니 여름에 어울리지 않게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비가 쏟아지려나, 하고 중얼거리는데 한 두 방울씩 빗줄기가 내린다. 나는 언제부턴가 비가 오기 전에 부는 바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해도 쨍쨍하고 구름도 하얀데 비가 제법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해 빨래를 걷어 다용도실로 들어갔다. 주방에 연결된 세탁실 겸 다용도실은 또 바깥이랑 연결되어 있어 빨래를 널고 걷을 때 편리하다. 그 문을 열면 파란 하늘과 그 아래 초록색 산이 보인다. 시원한 바람이 솔솔 들어오길래 바닥에 그대로 앉아 비를 감상했다. 오랜만에 참 좋다는 기분을 느껴본다.
여름에는 햇볕에 빨래가 말라가는 게 좋아 빨래가 귀찮지 않다. 해가 좋은 날에 빨래를 널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든다. 하루의 햇살과 바람이 깃든 옷에는 그 따듯한 촉감과 냄새가 고스란히 배어있어 잘 마른빨래를 걷을 때 기분은 참으로 뽀송뽀송하다. 소나기가 자주 내렸던 어느 날은 몇 번이나 빨래를 걷었다 널었다 한 적도 있지만 귀찮아도 해가 뜨면 바깥으로 향했다.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낡은 건조대를 폈다 접었다 또 폈다 접었다. 마당에 빨랫줄이 하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만한 공간은 없었다. 빨랫줄이 있으면 매일 전선줄 위에 앉는 제비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기도 할 텐데.
어릴 적 마당에 긴 빨랫줄을 달아놓고 기다란 장대로 줄을 받쳐놓았던 기억이 난다. 식구들 옷이 줄줄이 널린 풍경은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어느 집은 마당 빨랫줄에 또 다른 집은 현관 앞 옷걸이에 걸린 옷가지들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볼 수 있다. 햇살과 바람에 잘 말라가는 옷들을 보고 있으면 괜스레 기분이 편안해진다. 바람에 흩날리는 옷이나 커튼을 볼 때도 그렇고 기분이 그렇게 한가할 수가 없다.
한더위가 기승이지만 이것도 곧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더위도 장마도 모든 게 다 괜찮은데 마음과 몸이 그렇지 못해서 이번 여름은 힘이 들었다. 그래도 잘 마른빨래와 열린 문사이로 바라다본 하늘과 산, 비 내리는 풍경이 있었으니까 그것으로 되었다. 그래야만 했고, 어떤 상황에서든 좋은 것들을 찾아 웃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겪어야지 계절이 지나가듯 힘든 일도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