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울고양이 Feb 05. 2022

독일에서 공대 다니기 - 추억회상

그때의 독일 그리고 그 후  

내가 처음 만난 독일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건너간 독일, 그 당시만 해도 독일은 분명 한국보다 잘사는 나라였다. 아, 물론 지금도 잘사는 나라인 것은 맞다! 다만 그 격차가 10여년 전보다는 많이 줄어들었을뿐. 


그때는 대부분이 해외여행을 지금처럼 흔하게 제 집 드나들듯 다니는 시대는 분명 아니었던 것 같다. 조금 사는 집 친구들이나 미국 또는 유럽연수를 어릴 때 다녀왔고, 나는 독일 이전에는 비행기라고는 이모가 사는 제주도를 갈 때 탄 것이 전부였다. 


그 예전에 독일 어학원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물론 지금이라고 훨씬 더 많아진 것도 아니지만, 내가 다닐 때는 정말로 몇 개 없었다. 나는 압구정에 있던 독일 어학원을 다녔는데, 그때 만났던 사람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들 중 몇몇은 여전히 연락을 하고 지내고 있다. 나는 당시 열 아홉살로 학원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고, 아마도 어학원 사람들 중 제일 무모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독일유학을 처음부터 머릿속에 생각했던 것은 절대 아니었고, 계기는 사실 수능성적이 준비했던 것만큼 나오지 못했던 탓이다. 인생의 첫 쓴 맛을 아주 강하게 느꼈던 것 같다. 그때의 좌절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나는 우울증을 비롯 더 이상 인생에 아무런 의미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하루하루를 힘들어했고, 처음에는 이 시련을 이기고자 엄마가 먼저 한국에서 가장 먼 곳으로의 해외여행을 제안했다. 그 엄마에 그 딸인걸까, 그 딸에 그 엄마인걸까. 우리의 생각은 그렇게 막연한 유럽 여행에서 불현듯 어딘가로의 유학까지 뻗어나갔고, 프랑스와 독일을 비교했다가 고3 시절 뜬금없이 꽂혀있었던 라틴어 책이 생각나서 독일로 결정했다(...) 나는 그 결심을 한 바로 다음날 유학원에 등록을 하고 그렇게 독일로 오게된다. 


유학을 끝까지 반대했던 아빠와는 무려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채 그리고 엄마는 훗날 내게 얘기해줬지만, 아무 망설임없이 엄마에게 손 한번 흔들더니 출국장으로 휙- 들어가버리는 내 당당한 모습에 그 먼 곳에서도 알아서 잘 헤쳐나갈거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혼자서 떠나는 먼 길, 태어나 가장 처음으로 혼자서 탄 비행기는 무려 8,569km나 되는 거리였지만 나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그 첫 독일행 비행기에서 내 옆에 하필이면 독일로 여행을 가는 엄마와 딸이 탔는데, 가족과 이별하고 앞으로는 혼자일 나와 묘하게 대조가 되는 모습이었어서 뭔가 유난히 강하게 기억에 남는다.  


나는 그렇게 독일 땅에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쾰른/본 공항에서 내려서 큰 캐리어를 두 개나 갖고 꼼짝도 못하다가 엄마에게 무려 공중전화로 전화해서 울었던 것을 기억한다. 정신을 차리고 택시를 잡으라는 엄마의 말씀에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무려 어학원에서 픽업 서비스를 신청했음에도 픽업 담당자는 오지 않았다...) 공항 앞에서 택시를 타고 본의 IFS 어학원에 도착했다. 






나는 독일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NRW) 주의 옛 수도인 본(Bonn)에서 어학원을 다녔는데, 아직도 그곳이 가끔 기억난다. 학원 이름이 IFS Bonn이었는데 혹시 다니셨거나 지금 다니고 계신 분이 있다면 참 반가울 것 같다. 


그 시절의 독일은 지금과는 많이 다른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 시절의 나 또한 지금과는 무척 다르겠지만. 

10여 년이 지나 다시 찾은 본 중앙역에서

나는 그로부터 십 년도 더 지나 생일을 맞아 다시 본을 방문했다. 독일은 변하지 않는다더니 아주 많은 것들이 변한 것에 놀랐고, 과거에 느꼈던 본과는 또 다른 새로운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랐다. 


본의 중앙역은 여전히 사람들이 많고 약간은 정신없었다. 빵과 커피를 파는 역 안의 베이커리들은 늘 사람들이 무언가 구입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지만 내게 중앙역은 유난히 예전보다 작아진 느낌이었다. 


아마도 지금의 내가 그때보단 더 많은 것을 보았고 독일의 더 많은 도시를 경험했기 때문이리라.


유로가 1800원이 넘었던 시절에는 매달 한국에서 받는 돈이 넉넉하지 못했다. 그 돈의 대부분은 독일어 학원비와 기숙사 방을 지불하는데 나갔다. 게다가 매달 나가는 교통비와 보험 그리고 생활비를 내고나면 매달 남는 돈은 거의 없었다.   


베토벤 동상이 있던 본의 중심가

지갑은 빠듯했지만 삶까지 빠듯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매일매일이 모험으로 가득했다. 지금도 그런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본의 시청에서 거주자 등록(Anmeldung)을 하면 일종의 선물로 박물관이나 미술관 전시 쿠폰 같은 것이 잔뜩 달려있는 공책을 줬다. 심지어 박물관 카페 방문시 커피나 핫 초콜렛 같은 음료까지 제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학생에게 가장 많은 것은 "시간"이었으므로 독일어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박물관이나 본의 행사장을 방문해서 문화생활을 거의 무료로 알차게 즐겼다. 


주말에는 학원이 없었기 때문에 주로 NRW 주 근교로 여행을 갔다. 

당시만 해도 월 교통비 티켓(Monatskarte)이 60유로가 안됬고 그 티켓으로 꽤 멀리까지 횟수 제한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이따금 학원 수업을 땡땡이치고 친구들과 라인 강변에서 유람선을 타거나 브륄(Brühl)이라는 도시의 판타지아 랜드라는 놀이공원을 갔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조금 기분이 들뜨는 것 같다.     


본의 시장이 서는 곳(Bonner Marktplatz) 부근에 있던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샴페인

이제 막 이십 대가 되어 바라봤던 십여 년 전의 본은 낯설고 두렵지만 새로운 것이 가득한 곳이었다. 또 주머니가 가벼웠기에 비싼 레스토랑이나 카페 생활을 많이 경험하지는 못했던 곳이다. 


그 후 독일에서 학업을 모두 마치고 직장생활도 몇 년 했다. 생일을 맞아 추억여행을 하기위해 다시 찾은 본은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짠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나는 무엇을 위해 이 먼 땅까지 와서 낯선 독일어를 배우고 가족도 없이 홀로 독일인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 했을까. 


나는 당시 금요일이면 친구와 자주 들렀던 '주먹만한 대봉감을 무려 10개에 3유로'에 팔던 

과일 아저씨가 있던 마크트할레(Markthalle: 로컬 시장이 서는 곳)에서의 날들을 추억했다. 


이제는 조금 나이도 들었고, 밥값도 하고 있다. 이따금 특별한 날 샴페인을 병째로 주문할 경제적 수준이 되었지만, 나는 종종 그때의 내가 그립다.






프로스트의 시를 떠올리며, 만일 내가 그때 독일로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둘로 갈라져 있었다.
안타깝게도 두 길을 한꺼번에 갈 수 없는
한 사람의 여행자이기에, 오랫동안 서있었다,
한 길이 덤불 속으로 구부러지는 데까지
눈 닿는 데까지 멀리 굽어보면서;

그리고 다른 한 길을 택했다,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좋은 이유가 있는 길을,
풀이 우거지고 별로 닳지 않았기에;
그 점을 말하자면, 발자취로 닳은 건
두 길이 사실 비슷했지만,

그리고 그 날 아침 두 길은 똑같이
아직 밟혀 더럽혀지지 않은 낙엽에 묻혀있었다.
아, 나는 첫 길은 훗날을 위해 남겨두었다!
길은 계속 길로 이어지는 것을 알기에
내가 과연 여기 돌아올지 의심하면서도.

어디에선가 먼 먼 훗날
나는 한숨 쉬며 이 이야기를 하고 있겠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덜 걸은 길을 택했다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The Road Not Taken

by Robert Frost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