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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주 Feb 05. 2023

야메

야메는 지금도 사회 밑바닥에 살아있었다.

   미용실로 흰머리 남자가 커트하러 들어가기엔 용기가 필요했다. 옆자리에서 나이 든 아주머니 두 분이 피부 늘어져 고민이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야메로 눈썹 문신하는 곳 있는데 싸고 잘해”

  라고 하자 맞장구치듯

  “보톡스 야메로 놔주는 곳 있는데 반값이래.” 

  야메라는 말이 어릴 적부터 들었던 터라 익숙하게 귓속을 파고든다. 이천이십삼 년에 야메가 존재한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법대 교수가 아들 온라인 시험을 대리로 본 사건이나, 대치동 학원가에서 자기소개서를 대신 써주는 일, 짝퉁 명품을 생산하는 것들도 현대판 야메다.     

  육십여 년 전 고향 '신대리‘는 대천 읍내에서 주막을 지나 이십여 리 길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산골 마을이었다. 그런 탓에 읍내보다는 야메로 이루어지는 일이 많았다. 



  한 달에 한 번 야메 미용사가 마을에 들렀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그날이 머리 손질 날이다. 읍내보다 가격이 싸고, 외상이나 곡식으로 대납할 수 있어 좋아했다. 그는 의자를 대신할 함지박과 화로 준비를 부탁하더니, 가죽으로 된 낡은 가방을 열었다. 몇 종류의 빗과 가위, 연탄집게같이 생긴 길쭉한 철제 고데를 비롯하여 검은색 액체가 묻은 염색 약통 몇 개도 꺼냈다. 화로에 숯불 피우고, 고데를 올려 달궈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먼저 온 ‘갑순이’ 아주머니가 엎어놓은 함지박에 걸터앉았다. 미용사는 염색약으로 얼룩진 흰색 가운을 아주머니 몸에 둘렀다. 빠른 가위질로 흰머리 섞인 머리카락을 잘랐다. 아주머니들은 빠른 손놀림이 신기한 듯 바라보며 차례를 기다렸다. 단정하게 자른 머리는 파마를 시작했다. 달궈진 고데를 꺼내 젖은 수건에 쓱- 문지르자 치익- 칙- 하얀 김을 품어낸다. 고데를 얼굴 가까이 가져가 온도를 측정한 다음 엿장수 가위 치기 하듯 빗과 고데를 능숙하게 돌려가며 머리칼을 동글게 말아 파마를 완성해 갔다. 그는 온종일 동네 아주머니 머리를 손질했다. 대가로 쌀이나 잡곡 두서너 됫박을 받았다.


  미용사가 다녀간 며칠 후 아주머니들이 “영철 엄마가 야메로 애 지운데”라며 수군댔다. 저녁 먹고 난 다음 읍내 산파가 애 지우러 왔다며 몇몇 아주머니들이 영철네 사랑채로 몰려갔다. 물이라도 데워 도와주려는 심산이다. 다음 날 “영철 엄마가 하혈 많이 했는데 피가 멈추지 않아서 산파가 밤새 고생했데”라고 같이 했던 아주머니가 전했다. 며칠 누워있던 영철 엄마는 중절 수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동네엔 “애 떼다 잘못되어 죽었댜-"라는 부고가 전해졌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의료사고라고 의문을 갖거나 야메 의사를 고발하지 않았다. 명이 짧아 죽은 거라고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인정할 뿐이었다. 동네에는 야메로 애 떼다 죽은 사람이 처음은 아니었다. 무지 탓일까? 아니면 그렇게 살아온 탓인지? 영철 엄마의 죽음은 그리 인정되고 잊혔다.  

   

  자전거 타다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일주일 정도 지나 쇳독이 올랐는지 상처 부위가 빨개지면서 통증이 심해지고 곪기 시작했다. 된장 바르고, 쑥 으깨 붙이는 자가 치료 단계는 지났다고 판단한 아버지는 산 넘어 관창리에 있는 야메 진료하는 최 씨를 찾아갔다. 동네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최 씨를 찾아가 진찰받고 치료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야메 의사는 상처를 보더니 고름을 빼내기 위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믿을 곳이라곤 최 씨뿐이라 수술을 받기로 했다. 큼직한 솜뭉치를 알코올에 적셔 상처 부위를 소독하고, 놋쇠로 만든 수술용 바수(메스의 사투리)를 끓는 물에 소독했다. 어른들이 내 손발을 움직이지 못하게 잡는 것으로 마취제를 대신했다. 상처 부위를 절개하여 고름을 빼내고 그곳에 심지를 박는다고 했다. 서부영화 한 장면 같은 수술이 시골집 사랑채에서 이루어졌다. 삼 센티 정도 상처 부위를 절개하고 피고름을 짜냈다. 극한 통증은 내 몫인 듯 괴성도 강한 몸부림도 마취제를 대신해 무자비하게 움켜진 어른들 손아귀 힘에 통하지 않았다. 수술은 끝났고 어른 손아귀에 제압당한 손발에 멍이 잡혔다. 새살이 잘 돋아나도록 ‘이명래’ 고약을 붙여주고, 하루에 두세 차례 바꿔 붙이라는 처방도 알려주었다. 누구도 최 씨를 야메 의사라고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치료를 잘하는 의사로 인정할 뿐이었다.     



  야메는 농촌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교 시절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사지바지’(울 바지)을 야메로 파는 곳이 있다고 하여 동대문 시장을 찾았다. 검게 염색하여 교복 바지로 입을 심산이다. 울 소재라 따뜻하고 다림질하면 칼 주름 잡혀 우쭐대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서울 동대문이나 남대문은 야메시장의 결정판이다. 동대문 광장시장에서는 군용(軍用) 물품을 파는 곳이 많았다. 그곳에 가면 탱크도 구할 수 있다는 말까지 유행할 정도다. 군복에서부터 군화, 야전삽, 대검, 버너 등 美군용 물품을 야메로 파는 곳이 많았다. 구제품 청바지, 양담배, ‘플레이보이’ 포르노 잡지를 구하려면 남대문시장을 찾으면 된다. 좁은 골목 양쪽으로 ‘미제장수’ 아주머니들이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신기한 물건을 빼곡히 진열해 놓고 팔고 있었다. 골목을 돌아 신세계백화점 쪽으로 나오면 돈이 든 것으로 보이는 손가방을 가슴에 안은 채, 조그만 의자에 쪼그리고 앉은 아주머니들이 “달러 있어요. 달러” 하며 조용한 소리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소위 ‘암달러 장수’라 불리는 야메 환전상들이다.    


  가난한 농촌에서는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도시에서는 정상적인 과정으로 환전할 수 없는 달러 거래나, 밀수품 등이 뒷골목에서 야메라는 이름으로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은 생활의 일부였다. 흰머리가 덮어버린 세월 속에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던 야메가 아직도 사회 이곳저곳에 살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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