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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주 Jun 22. 2023

애인이 되어 주세요.

마누라는 그를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고 했다.

  마누라에게 애인이 생겼나 보다. 늦은 나이에 심경에 커다란 변화가 있는 듯하다. 언제부턴가 몇 가지 증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치 없는 내 감각에도 느낄 정도니 사달이 난 게 분명했다. 

  뒤를 캘 수도,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혼자 고민하고 모른 척 살펴보기만 하려니 의심은 점점 커졌다. 관심 없던 유튜브 덕질에 매달리고, 음악 틀어놓고 흥얼대더니 따라 부르기까지 한다. 콩나물값 몇백 원도 아끼던 사람이 콘서트 티켓예매에 이십여만 원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이해 못 할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콘서트 가는 날엔 드레스코드 맞추느라 여간 신경 쓰는 게 아니었다. 평소에 싫어하던 보라색 옷에 보라색 머플러를 두르고 핸드백까지 유사 색상으로 맞췄다. 

  최영미 시인이 육십 세란 시에서 말한 ‘허리가 구부러지고/피부는 까칠해지고/눈은 희미해지고(중략) 아주 작은 것에도 만족하는 불평쟁이가 되었다.’라고 했는데 육십 세 중반을 넘어서 사춘기 소녀처럼 행동하는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팬카페에 매달려 댓글 달고 소통하며 친구와 수다 떠는 듯 행복해한다. 음원 조회 수 올려준다고 밤늦게까지 핸드폰 붙들고 스밍(streaming) 하는 모습은 내가 아는 마누라가 아니었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연예인 이야기하면 한심하다는 듯 코웃음 쳤던 마누라다.  

   

  마누라가 활동하는 카페 회원 대부분은 지천명에서 종심에 이르는 중장년층이다. 갑자기 변한 마누라의 심리상태를 다른 방향에서 엿보기로 했다. 

  늦은 나이에 대중가수 팬덤(fandom)에 빠져 행복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히트 칠 때 주연배우(배용준)를 보겠다고 일본의 중년여성들이 단체로 우리나라를 찾는 것을 보면서 의아해했던 일이 마누라에게 현실이 되었다. 

  새 음반이 나오면 선착순 예약하고, 콘서트 관람은 물론 굿즈(goods) 사는 것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아이돌에 푹 빠진 사춘기 손녀와 비교해도 열정이 넘칠 정도다. 마누라는 제2의 사춘기를 맞은 듯하다. 

  열심히 사느라 잊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 정체성을 찾아 나선 것 같다. 잊었던 자아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동하는 듯하다. 같은 시대의 유사한 삶을 살아온 동질의 여성들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새로운 사회현상의 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삶에 돌파구가 필요했던 중장년층 여성들에게 불쏘시개로 작용했던 계기가 있었다. 모 방송사의 트로트 가요 경연 프로그램이다. 출연 가수들을 보면서 사느라 포기했던 내면에 숨겨진 젊은 날의 환상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사춘기 때의 심리적 만족감으로 자아를 찾는 자연스레 팬덤이 형성되었다.     

  동질의 팬덤에서 자아실현의 만족을 찾는 극성팬이 되어가는 마누라를 보면서 희생이란 자체를 느끼지 못한 채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를 위해 고운 옷 한 벌 마음 놓고 사지 못하고 자녀 양육에 남편 뒷바라지…. 지칠 대로 지쳐 자신의 존재를 잊고 살았던 마누라에게 좋은 애인이 생긴 듯 생기 있는 미소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가 부르는 노래를 떼창으로 함께 부르며 즐거워하는 마누라가 보고 싶다.

  오늘도 마누라는 김호중의 ‘애인이 되어 줄게요.’를 흥얼거리며 옅은 미소를 보인다.    

  

    “여보, 애인 생겼소? 싱글벙글 웃고 다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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