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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주 Oct 12. 2023

졸혼을 선택해야만 했다

잘못된 만남으로 사십여 년 간 사랑 없는 부부관계를 이어왔다

  술 한잔했다며 그는 전화를 걸어왔다. 술 마시고 전화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고민 가득 담은 술기운이 느껴진다. 기독교 신자인 그는 몇 차례 고해성사로 반성하고 위안도 받았으나 현실적 고민은 나에게 털어놨다.

  그는 오늘 충격적 선언을 했다졸혼한다는 거였다수십 년 동안 사랑 없는 부부관계를 이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한계에 봉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와 어릴 적부터 살아온 과정을 함께했기에 결단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빈농에서 태어나 시골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진학했다. 생계와 학비를 스스로 해결하며 야간 고등학교를 힘겹게 졸업하고 스물다섯에 공무원에 합격하여 불행이 끝났다며 가슴 벅차했던 그였다.

  행복의 씨앗이 불행으로 발아되리라곤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지금에 그를 만들었다. 초임 공무원 교육 과정 한 달 후 평가시험을 마치고 단체 회식이 화근이었다. 삼십 명으로 편성된 남녀 교육생은 각 부처에서 모인 젊은 공무원들이었다. 9급에서 7급까지 다양한 직렬이 함께 했는데 가장 어린 7급 공채인 그는 여성 교육생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술잔이 그에게 집중되었고 막내 격인 그는 술잔을 거절하지 못하고 원 샷으로 비웠다. 끝날 무렵 인사불성 상태로 필름이 끊겼다.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파 잠에서 깨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여관방이었다. 겉옷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속옷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기겁할 일은 벌거벗은 여성이 옆에 누워있는 거였다. 전혀 기억 없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으니 말을 잊었다.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두통이 싹 가셨다.

  알지 못하는 남녀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민망한 상태로 나란히 누워있는 상황인데 그녀는 의외였다. “많이 취했던데 괜찮아요?” 걱정까지 하다니…! 

  그녀는 회식을 함께 한 다른 부처에서 온 교육동기생이었다. 샤워용 수건으로 몸을 감싼 채 구석에 놓여있는 주전자에서 물 한 컵을 따라와 마시라고 건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뭘 걱정하지 말라는 것인지?

  도망치듯 여관을 빠져나와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머리를 움켜쥐고 상황을 복기하려 쥐어짜도 끊긴 필름은 재생 불가였다. 

  그날 이후 원하지 않은 만남이 이어졌고 갈등도 심해졌다. 연애가 아닌 그날 밤의 책임 공방에 대한 최악의 지루한 언쟁이었다. 만남 횟수가 늘어날수록 치부만 드러날 뿐 여성이라는 느낌은 한 점도 없었다.      

  가부장적 부모의 영향으로 이런 지경이면 남자가 여자를 책임져야 한다는 윤리적 의무감 같은 것이 문제였다. 그런 내재된 인식이 사랑 없는 결혼을 결정한 오류로 작용했다. 살다 보면 사랑할 마음이 생기고 좋아지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로 의무 결혼을 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사랑은 고사하고 첫날밤 여관 상황에 대하여 곱씹어 의심이 커졌다성폭행했는지성폭행당했는지어떻게 여관에 오게 되었는지

  사랑 없는 결혼은 악몽임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실망의 연속이었다. 연상이었던 그녀는 남편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는 듯 사사건건 사생활을 통제하고 싸움이 잦아졌다. 싸움의 정도가 지나쳐 이성을 잃고 죽일 듯 폭력적이고 상상할 수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심지어 식칼로 같이 죽자고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수십 년 반복되는 아내의 폭력 행위를 방어할 의지가 상실된 정신적 가스라이팅(gaslighting) 상태였다폭력을 받아들이는 심각한 상태라 주변 도움 없이 이 상황을 벗어날 자력이 없었다. 스스로 도피할 유일한 방법은 술에 취하는 거였다. 

  몇 년 전부턴 통화 중 살아갈 의미가 없다거나, 자살하는 사람을 이해한다는 등의 말을 자주 했다. 몸에 힘이 빠져 무기력하고, 사람 만나는 것조차 싫다고도 했다.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를 살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까지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행복한 결혼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고 인생을 끝내게 할 순 없었다. 우선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자고 했다. 우울증이 더 심각한 사태로 진행되는 걸 막아야 했다. 병원 가는 것조차 아내 눈치를 살필 처지가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인생 재출발을 위해 이혼 의사를 물었다. 아내에게 이혼이란 단어 자체를 꺼낼 상황이 아니고, 고위공직자를 지낸 그가 이혼남이라는 불명예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혼은 할 수 없다고 했다. 우선 아내에게서 벗어나 정신적 안정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차선책으로 졸혼을 권했다. 불명예, 재산 분할, 자녀 결혼, 법적 이혼절차 문제를 비켜 아내와 우선 떨어져 지내보자며 설득했던 것이 오늘 폭탄선언으로 나타났다. 이삼 년 후 이혼으로 종결되리라 짐작된다.    

  

   졸혼을 택한 그에게 가슴에 남아있을 사춘기 시절 설레며 따라다녔던 이웃 여학생에게 느꼈던 아름다운 사랑 만을 기억하며 황혼의 삶을 지낼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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