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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운 Feb 23. 2022

‘유리’양의 정체는 과연 누구?

마이 싸이월드 페이퍼 : 스페셜 1회

  2002년 초 겨울, 내가 복무했던 백마부대 30연대 3대대 9중대 포반은 2소대와 함께 파주의 508 항공대대로 근무 파견을 나갔다. 약 석 달 동안 하루에 6시간에서 8시간씩 근무만 서야 했던 일이었다.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근무만 선다는 것이 지루할 법도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모든 작업과 훈련에서 제외되던 터라 나를 비롯한 장병들은 다들 맡고 싶어 했다. 운이 좋게도 나는 무려 세 번이나 파견을 나갔다. 세 번째 파견이 바로 2002년 초였다. 

  어느 날, 난 후임인 신일병과 함께 대공초소 근무를 나갔다. 두 시간 동안 항공대대 주변 상공과 거리를 관찰하는 것 외엔 딱히 할 일이 없는 근무였다. 그런 터라 대부분의 장병들은 두 시간의 근무를 재미나게 보내기 위해 후임병과 잡담을 나누거나 초소 벽에 쓸데없는 낙서들을 하며 시간을 죽였다. 당연히 그 낙서들이 쌓이고 쌓여서 대공초소 안은 새로 페인트칠이 필요할 정도로 온통 검은 낙서들로 가득 했다. 그런데 신일병과 함께 한 그 날은 바로 전날까지 볼 수 없는 대형낙서가 큼지막하게 적여 있었다. 


                                      ‘유리야, 사랑해~~~’


  글씨체를 보니 딱 2소대에 있는, 나보다 두 달 후임인 김분대장이었다. 재미난 볼거리를 발견한 나는 바로 신일병과 ‘유리’양의 정체에 대해 추리하기 시작했다.


  “핑클의 ‘성유리’겠지?”

  “최상병님, 쿨의 ‘유리’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에이, 같은 유리면 성유리지. 설마 쿨의 유리를 좋아할까?”

  “그래도 모르는 겁니다.” 


  근무 시간 내내 난 신일병과 핑클의 유리와 쿨의 유리 사이에서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다 결국 내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근무에서 돌아와 이 이야기를 엿들은 내 직속 후임 김상병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그냥 여자친구 이름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요새 유리라는 이름이 얼마나 흔한데.”


  김상병의 얘기를 들어보니 정말 그럴듯했다. 


  ‘하긴 김분대장이 초소에다 쓸데없이 연예인을 좋아한다고 적는 바보는 아닐 것이고. 유리라는 여자친구가 정말 있나? 그런 소리는 못 들었는데. 이럼, 내기의 승자가 없잖아.’ 


  유리양의 정체가 무척 궁금해진 나는 김분대장에게 그녀가 누구냐고 추궁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신일병과의 내기도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몇 주 후 일요일 아침, 다른 장병들은 야간 근무로 인해 오전까지 곤한 잠에 빠져있는데 유독 김분대장만 TV를 시청했다. TV에서는 KBS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방송하는 <학교 4>라는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근무를 나서기 전 나는 슬쩍 김분대장에게 물었다.


  “재밌냐? 잠도 안 자고 이걸 보게.”

  “재미는 별론데 제가 좋아하는 여자탤런트가 나와서 보고 있습니다.”

  “그래? 누군데?”


  김분대장은 한 여자탤런트를 가리켰다. 그녀는 극중에서 날라리 역을 맡고 있었는데 늘 껄렁껄렁한 자세에 보글머리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역할이 그런 것이겠지만 그래도 남성 시청자가 반할만한 그런 비주얼은 아니었다. 따라서 김분대장의 취향이 참으로 독특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여자탤런트는 몇 달 후 여름, <러빙 유>라는 드라마에서 유진, 박용하와 함께 출연하며 이 둘을 갈라놓는 악역을 연기했다. 그 때는 좀 참한 아가씨답게 나오긴 했다. 눈빛이 매섭게 변할 때도 있었지만. 그리고 오프닝 크레딧에서 그녀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올 겨울, 항공대대 대공초소 벽에 김분대장이 적은 ‘유리’양의 정체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김분대장은… 당시 탤런트 ‘이유리’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 당시 이 드라마에는 '이유리' 말고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탑 배우들이 많이 출연했었다.




(에필로그)     


  2000년 말, 내가 아직 군복 왼쪽 가슴에 겨우 작대기 하나 달고 있을 무렵, 전역이 두 달 남은 고참 하나는 무려 자신보다 일곱 살 어린 여자 가수를 좋아하며 야단이었다. 고참의 나이가 나랑 같은 스물 두 살이었으니 그 여가수는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그 가수를 좋아하는 것은 원조교제입니다.”


  난 그 고참과 함께 근무를 서면서 이등병답지 않은 아주 당돌한 태도로 그렇게 말했다.


  “야, 너도 나중에 복학해서 학교 가봐라. 그런 후배 꼬신다고 야단일걸.”

  “전, 병장님과 틀립니다. 그게 어디 막내 여동생이지 여자친구가 됩니까?”


  그런데 이년 후, 그 고참이 좋아했던 열다섯 살 여가수가 2집 앨범을 발표하고 활동하면서 나도 살짝 그녀가 좋아졌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내 여친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내 여동생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무지 많이 했지만….


  그 여가수는 바로 ‘보아’였다.

  그리고 난 2000년 말, 그 고참에게 자신 있게 다짐했던 대로 한참 어린 후배를 꼬신다고 야단법석을 피우는 늑대 같은 복학생 오라버니가 되진 않았다. 


* 나도 2002년에 발매한 2집부터는 '보아'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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