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의 회로를 따라서
지식순환 협동조합원은 우연히 인터넷 서핑 중에 알게 되었다. 그때 난 뭔가 새롭고 신선한 교육공동체를 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공감하고 협력하는 교육공동체인 지식순환 협동조합은 그런 나의 취지에 맞았던 곳이기에 내가 그곳을 발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곧바로 조합원에 가입했고 여름 대중강좌로 몇 개의 과목을 신청하게 되었다. 위치는 서울이라 내가 있던 군포에서는 먼 거리이기는 했지만 나보다 더 멀리서 오는 사람들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그곳에서 영화 관련 과목과 심리학을 듣게 되었는데 영화 과목은 띄엄띄엄 수업을 빼먹으면서 다녔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별한 경험을 준 심리학 수업은 나와 타인의 감정을 직면하고 수용하며 습관처럼 저항하는 나의 감정적 습관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게 만드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수업시간이면 사람들은 둥그런 원을 중심으로 앉아 지난주에 느꼈던 사적인 감정들이나 기억나는 것, 혹은 신체적 감각들을 자연스럽고 편하게 말하는 것으로써 시작했다. 다음 모임 날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공유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에는 여기 모인 모두가 이 대화에 진지하고 더없이 솔직하게 임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날에는 선생님의 지도 아래 연극배우처럼 배역을 맡고 상황심리극을 하기도 했다. 그 과정 중에 스스로가 갖고 있는 사회적인 가면과 역할을 수행해내기 위해 자신이 해왔던 심리패턴에 속상해하는 사람을 보기도 했다. 몇 차례에 걸쳐진 심리학 수업이 끝마치고 쫑파티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그런 모임을 이어 나가기로 했다. 찬성한 몇몇이 만들어낸 모임은 독서모임과 비슷했다. 인원은 훨씬 적었지만 나에게는 이 시간과 만나기 위해 심리학을 듣게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곳에서 줄리아 카메론의<<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향이 켜진 반지하의 작업실에 모여 이제는 4명이 된 소모임으로 시작한 우리는 매일 아침 모닝 페이지를 써 가면서 생기게 된 감정과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의 내면 상태를 점검하고 연대의식이라는 장점을 통해 창조적 의지들을 이끌어나가기 시작했다. 무언가 나를 보살펴주고 지켜봐 주고 있다는 온전한 내편이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는 것만으로 힘과 지지를 받는 것 같았으므로 어떤 일이든 나의 결심과 결정들이 쉽게 흔들리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에 스스로 깎이지 않는 용기를 내게 했다. 무엇보다 모닝 페이지를 쓴다는 것은 나에게는 낯설고 미심쩍으면서도 새로운 생활을 의미했다. 어떤 변화가 이루어지기 위한 준비단계였지만, 한편으로 나는 그 모임을 통해서도 완전히 나를 열어두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타인에게 숨기고 싶어 하는 내가 있으며 보호해야만 하고 안전하지 않는 곳에서 체면을 차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더 용기를 내어 가장 나다운 것을 내 보이기 위해 자연스러워지려고 했다. 그렇게 아티스트 웨이와 함께한 12주간의 창조성 워크숍이 끝나고 우리는 소풍을 떠났다. 봄이었고 한가한 점심시간이었다. 집에서 싸온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나누어 먹고 나서 어떤 계획도 없이 모임 중 두 명은 눈앞에 보이는 탁구대에서 자연스럽게 탁구를 쳤고 한 명은 누군가 정리하지 않은 테이블 위의 책을 보기 시작했으며 나는 가만히 서서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떼를 보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며 각자가 추구하는 작은 즐거움속에서 가장 완벽하게 삶을 즐기고 있었다.
천주교 신자였던 나는 언제부턴가 밤이면 수호천사에 대한 기도를 해왔다. 아주 어렸을 적에 저녁이면 내 방에 흰색 기저귀 천이 천장에 매달려 있고 한쪽 옆에는 늘 촛불이 켜진 채 평화스러운 정적이 내 베개에 배어 있곤 했다. 나는 내 방 곳곳에 피어있는 그 은은한 불빛과 정성스러운 정적이 좋았다. 그 공간은 마치 엄마의 자궁 속처럼 처음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안전한 동굴 같았다. 어린 나에게 그것은 신성과도 같은 느낌이었을까, 나는 저절로 눈을 감아보고 그 깜깜한 어둠 속에 보이는 나라는 현상에 깊이 다가가려 모든 신체기관을 보이지 않은 정적에 집중했었는지 모른다. 그런 보호받고 있는 우주의 느낌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어렸을 적부터 수호천사의 존재 여부를 믿어왔다. 그리고 항상 기도했다. 보호받는 느낌이 언제나 항상 내 곁에 감싸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 느낌은 정말 따스하고, 친절하고, 고양적인 느낌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전적인 지지라는 것이 이런 느낌과 닮아있지 않았을까? 그 존재를 아무 이유 없이 지지한다는 것은 얼마나 당연하고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 것일까, 문득 생각했다. 사람에게는 타인이라는 나와 다르면서도 본질적으로 닮아있는 한 존재를 무조건 받아들임으로써 얻게 되는 순수한 감동이 존재한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며 너무 피상적으로 존재를 보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존재에서 오는 그 순수한 감동이 매번 우리 앞에 도착하지 못한 채 사라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인이 되면서부터 그 소중한 마음의 열림을 나의 문제나 작은 시선으로 막아놓음으로써 나의 창조성마저도 저절로 닫게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순수한 존재를 바라보면 감동 투성이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고양이나 강아지를 무연히 바라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여태껏 수호천사에게 하는 기도들은 나 자신에게 전적으로 지지받고 싶었던 내 안의 가장 큰 욕구가 창조해낸 신이 아니었을까? 자전하는 나를 향한 의도들은 오늘도 내 안에서 따뜻하게 누울 자리를 찾고 있다. 가장 나다운 모습이 누군가 앞에 망설임 없이 창조되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