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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 여름밤 아카시아 Feb 18. 2022

당신이라는 문장이 스쳐간 자리

어떤 우연은 우연이 되는 연습을 하기 위해 천 번을 연습했는지 모른다. 

필리핀 바기오에서의 보름 동안의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나는 다시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로 했다. 여행을 가기 전 바리스타 2급 자격증을 따놓았고 나는 그 자격증을 내밀며 베이커리 카페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평촌역 근처에 있는 베이커리 카페였는데 처음 면접을 보았을 때의 사장님은 친근하면서도 편안한 50대 후반의 남자 사장님이었다. 언제나 직관과 느낌을 중요시하는 나로서는 뭔가 느낌이 괜찮았다. 카페는 대부분 오래된듯한 인테리어였고 내부에서 먹을 수 있는 홀과 한쪽에는 그리 크지 않은 빵 진열대가 놓여 있었다. 분명 천연발효 종인 수제 빵을 홍보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분위기만으로는 음료 위주로 팔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출근을 하게 된 이후에 나는 사장님이 책 마니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필로 밑줄을 쳐가며 항상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은 데이비드 호킨스의 <<놓아버림>>이라는 책이었다. 책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나로서는 흥미로워 보이는 책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읽어보지 못한 부류의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오래된 책을 소장하고 있는 엄마를 통해 고전을 탐독하고 책을 좋아했던 나로서는 한동안 방황의 시기를 거치면서 책과 멀리했었기 때문인지 새로 읽을 책을 만난 것 같아 내심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그 책은 곧 나에게 새로운 삶이 되었다.


삶이란 살아가는 내내 찾고 싶은 구절을 열심히 뒤적이지만 그때마다 쉽게 찾아지지 않는 거대한 책과 같은 것이라 여겼다. 무엇을 해야 할지 더는 모르겠을 때 우연히 내 앞에 나타난 책들은 그래서 소중했다. 그때 나는 손님이 뜸해진 시간에 한쪽 공간에서 책을 읽으며 세상에 이런 책이 있었구나라는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내가 읽어왔던 책들과는 전혀 결이 다른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데이비드 호킨스에 대한 저서들을 하나하나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평범해 보이는 베이커리 사장님이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알게 되었다. 사장님은 내적인 가치를 위해 책을 읽어나가며 내면의 선한 의도들을 매 순간 삶에 적용시키려 하는 분이었다. 그것은 타인을 위한 헌신적 삶이었다. 그때 나에게는 놓아버림의 마음이 필요했던 것이었을까..... 모든 끌림에는 어떤 이유들이 필연적으로 내재한다는 사실과 모든 일의 흐름은 내가 그것을 불러낸 장본인이며, 모든 일의 비롯된 결과들은 내 선택적 장의 하나였다는 것을... 데이비드 호킨스와 더불어 나는 그에 관련된  다른 저자의 영적 도서들을  읽어나갔고 나의 독서 성향은 영적인 세계들을 편식했다. 


언젠가 비가 하늘이 뚫릴 것처럼 내리던 날이었었다. 송탄 미군부대 앞에서 엄마가 옷가게를 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미련 없이 포기한 나는 엄마의 옷가게에서 혼자 옷을 팔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었다. 거리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우산을 쓰고 있었지만 위협적으로 내리는 비의 양에 서서히 발목이 잠겨가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길 한가운데에 서서 이 위기를 헤쳐나갈 고민을 하고 있었다. 버스는 물론 항상 보이던 택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저 멀리서 기적처럼 택시 한 대가 오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곳에서 택시를 타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자연의 영향이 주는 불운의 상태에 몰입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택시를 탔지만 조금 이상했다. 50대쯤으로 보이는 택시 아저씨는 붉은색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택시 안에서 베레모라... 나는 나의 미학적 취향에 어긋나는 택시 아저씨의 모자를 물끄럼이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저씨는 나에게 갑자기 생년 월시를 물었다. 새로 바뀐 요금체계인가 하여 얼떨결에 대답한 나는 나에 관한 삶을 술술 내뱉는 택시 아저씨의 뒤통수만을 물끄럼이 바라보게 되었다. 택시 아저씨는 곧 나의 한쪽 손을 펴보라고 했다. 무언가 이상한 기운에 끌려 착실해진 마음으로 한쪽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아저씨는 또 술술 나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택시 아저씨의 말이 사실이 될지 아닐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그 택시 아저씨가 말한 내 과거의 내용들만으로 그분의 본업인지 부업인지가 역술인임이 확실해졌지만 말이다. 그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날의 날씨들, 그날의 위협적인 상황과 그에 반해 너무나 평화로운 택시 안의 공기 그리고 묘한 택시 아저씨의 말들이 주는 나의 감정선에 닿았던 단어들의 소용돌이,  그 모든 상황들은 나를 그 장면 속으로 계속해서 이끌어가게 하는 강한 운명적인 기운을 느끼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었다. 분명 나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사주를 듣게 되었음에도 어찌하여 사주가 아닌 치유를 받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을까 당최 모르겠는 마음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세상에서 어떤 것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을 때 나는 그 불안감을 방어하기 위해 책을 읽어왔었다. 때로는 중독이 된 것처럼 방 안에서 나오지 않은 채 책만 읽는 나를 엄마는 늘 염려했었다. 나는 무엇인가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 있는 가장 원초적인 결핍이 너무나 불안하여 무엇이라도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았다. 어떤 인생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 내면에 관한 일들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 삶에 온 모든 우연이라 불리는 일이나 사람들과의 만남은  내가 어떤 질문을 하다 지쳐 있을 때  불현듯 나타났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그들의 말로써 혹은 그들의 행동으로써 나에게 어떤 방향을 가리키려 했는지 그 진짜 의미는 알 수 없다. 그저 나는 내가 겨우 해석해낸 마음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내게 건네 지는 신호들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나에 대한 모든 작위적인 마음들이  모두 놓아져 버렸을 때 정말로 내가 보아야 할 나침판들을 볼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한 상황을 위해 때때로 악조건이라는 인생의 풍경이 나타났고 그 조건 속에서 모든 상황을 포기하게 되었을 때 귀인들을 만났고 조금씩 인생의 결과 풍경이 달라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 꾸준히 자신대로 살아왔을 뿐인 그들의 삶이 나에게 명확한 힌트가 되어 지금의 방향을 보게 했다는 것은  나의 문장뿐만 아니라 나를 스쳐간 그들의 문장 또한 어딘가에 다시 쓰이기 위해 나를 이곳에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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