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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 여름밤 아카시아 Feb 27. 2022

집을 읽는 시간

떠나왔던 곳에서 나를 만나다

빈집의 감정을 읽는다. 어렸을 적 자주 빈 집에 혼자 남아있던 기억이 있다. 그때마다 까슬까슬한 회색 벽을 조금씩 넘어서서 시간에 따라 이동하는 그림자의 변화를 아무도 없는 마당 안에 앉아 조용히 탐색하곤 했다. 책을 읽어나가는 것처럼 혼자 남은 아이에게 버려질 자연의 문장은 없었다. 아이는 주위의 자연 속에서 자기 자신을 경험했다. 흙이 없는 마당인데 시멘트가 갈라진 금 안에서 혼자 피어있는 노란색 민들레를 보면 신기한 듯 그 앞에 앉아 민들레의 겹 속으로 무한정 시선을 뺏기곤 했다. 그러면 왠지 자신이 사라져 버린 듯한 오후의 허공 속에서 무언지 모를 기시감만이 느껴진 채  민들레를 보고 앉아있던 나와 조우하게 되는 생경한 광경을 겪곤 했다. 아마 강렬한 오후의 햇빛 탓이었을까... 졸음이 오기 직전의 일몰과도 같은 현상이었을까?... 꿈속 같던 존재의 침묵이 열리는 순간은 늘 빈집 안에서 은밀하게 일어나곤 했다.



집이 가지고 있는 풍경은 많았다. 집 뒤 마당에는 앵두나무에 붉은 앵두가 매달려있고 한낮의 새소리가 잠잠해지다 다시 소란해지며 마당 위로 뛰어들었다. 빈집은 빈집이기에 모든 발자국들을 끌어들였다. 낮은 구름이 지날 때면 잠시 어두워지는 마당 한편에 앉아 장독대 위로 태양이 끓어오르는 소리, 시멘트 위의 춤추는 아지랑이를 지나 엄마가 오는 늦은 저녁까지 내가 듣고 싶은 생명의 소리와 몸짓들이 나를 혼자 두지 않으려는 듯 잠시도 내 곁에 떨어지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하던 명랑한 잠자리들과, 벽을 타고 올라가는 도마뱀의 느린 오후,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에게서 남겨진 세상의 지문들과 공중에 남아있는 새들의 날갯짓 소리, 고양이 발끝에 들어 올려진 빛의 반사는 시간의 경험을 몸속에 따뜻한 감정으로 차곡차곡 쌓이게 했다. 그곳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지금 나는 제주도에서 돌담이 둘러진 전원농가주택에 산다. 이곳에 완전히 정착한 것은 아니지만, 새벽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새소리가 방안에 수줍은 빛처럼 하나 둘 서서히 스며들어온다. 새들이 가진 여러 가지의 목소리들이 내방을 들끓게 하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볕이 궁금해지는 시간이다. 나는 슬금슬금 움직인다. 멀구슬나무를 마주하고 있는 격자식 창문을 넘어가면 감귤밭과 바람 따라 시원하게 재잘거리는 도토리나무를 마주하게 된다. 한낮이 되면 도토리 나뭇잎들은 빛에 반사되어 바람에 더 풍성하게 온몸을 털어낸다. 도토리나무잎 사이사이로 파란 하늘이 시원하게 트여 있다. 이제 봄으로 접어들어 어딘가로 떠나는 시기에 다다랐다. 일정 시간 동안 거주 중인 이곳에서의 피어난 마음을 하나둘 정리하는 시간이 된 것이다.



저지오름이 남청색 지붕 뒤에 봉긋 솟아있다. 작고 둥그런 오름은 엄마품처럼 오늘도 내가 살고 있는 집을 친근하게 감싸고 있다. 내년 봄에는 이 땅에 심어놓은 꽃들이 피어날지도 모르겠다. 일 년 동안 이곳에 살면서 작은 텃밭에 해바라기와 옥수수, 코스모스, 백일홍, 금잔화 꽃을 심었다. 백일홍이 만발했을 때에는 난생처음 보는 나비들이 우리 마당에 놀러 왔다. 오전 열한 시가 되고 마당에 캠핑의자를 펴면 늘 방문하던 나비들이 백일홍 위에 앉아 자신들의 세상을 연일 짓고 있었다. 왕나비와 청띠제비나비가 제일 먼저 날아들고 그 외 다채로운 색깔의 나비들이 공중 위에서 서로 엇갈린 날갯짓으로 나를 설레게 했다. 그들만의 정해진 일과가 나의 하루에 거미줄처럼 맺혀 버렸을 때 나는 문득 이 광경 한가운데에 놓여있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소회가 들었다. 새들의 겨울 아침은 멀구슬나무에 앉아 노랗게 익은 열매를 배에 채워 넣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름이면 내 정원의 해바라기 씨를 한 톨도 남김없이 야무지게 쪼아 먹었다. 줄기 끝에 매달린 채 해바라기와 공중 사이를 공중제비 돌듯 퍼드득 거리고 쪼아 먹는 풍경은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새와 나비가 모두 나의 마당 안으로 뛰어들어 재잘거리는 통에 그 여름, 나의 집은 꽤나 북적거렸다.   



나는 어디에서건 자연을 발견하는 재능이 있었다. 지나가는 바람조차도 사람의 기운과 닿으면 정서라는 길이 생기고 그것과 함께 교감한다 보면 그 사람 안에는 없던 새로운 공간이 열매로 맺힌다. 그 공간은 때로 이야기가 되고 살면서 되돌아가고 싶은 정거장으로 그 사람 삶 어딘가에 남아 고요한 흔적이 된다. 그 물길 따라 살다 보니 왠지 나는 늘 무리보다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혼자 있으면 발견되는 자연의 느낌들이 내 안의 동심원을 이루어 더 큰 세상으로 물결쳤다. 그것은 조용한 호수를 바라보고 걷는 산책처럼 비밀스러운 풍경들이 낭독해주는 시 같았다. 혼자 있을 때는 늘 가장 벅찬 상태로 내 안의 빈집들이 하나둘 무언가로 가득 채워져 갔다. 지상의 빈집에 깃들어 살고 있는 동안  내가 자란 빈집이라는 공간들은 보이지 않은 생명들이 왔다간 기억으로 촘촘히 엮어져 어느새 나라는 여정 속에 함께 있는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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