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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브 Syb Feb 07. 2022

21세기 바벨탑, 슈투트가르트 도서관

고대의 거대건축물에서 영감을 받은 현대적인 도서관

대 피테르 브뢰헬, 1563, Tower of Babel

처음엔 도서의 수납과 보존에 그 목적이 있었던 도서관은 오늘날 현대 공공건축의 대표 격으로 자리 잡았다. 현대 도시의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읽고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라 지역 주민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문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인지 Yi Architects에서 설계를 담당한 슈투트가르트의 시립 도서관은 시내 중심에, 트램 정거장과 대형 쇼핑몰 앞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때문에 슈투트가르트 시내 구경 중 시간을 내어 방문하기에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바로 앞 쇼핑몰에서 식사를 해결하기에도 용이하다.


트램을 타고 도서관에 도착하면 크고 작은 사각형들로 이루어진 독특한 건물을 마주하게 된다. 9x9 배열의 유리벽돌 프레임이 정육면체의 사면을 둘러싸는 건물의 파사드는 일견 무슨 용도의 건물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동서남북 4면으로 나 있는 출입구는 입면 요소의 위계질서(Hierarchy)와 상징성을 최대한 자제해, 어디가 정문인지 알기 어렵다. 때문에 어느 방향에서도 접근할 수 있어 공공건축물로서 도서관의 포용성과 공공성을 극대화시킨다.


답사를 목적으로 슈투트가르트 도서관에 방문했다면,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서 내려 서가가 늘어선 갤러리 홀부터 차례로 둘러보기를 추천한다.


중앙의 커다란 보이드(Void) 공간을 중심으로 시계 방향으로 도는 계단을 따라 올라갈수록 보이드 라인이 조금씩 후퇴하는 평면으로 구성된 갤러리 홀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거꾸로 뒤집어진 '지구라트'를 떠올렸다. 면적이 다른 여러 개의 단으로 구성된 모습이 단탑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가장 꼭대기 단의 난간에 서서 보이드를 내려다보면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 서가를 누비며 책을 고르는 모습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곳에 서서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 신화를 떠올려 본다.


전설 속 건축물인 바벨탑은 인간들이 천국에 닿으려고 짓기 시작했는데, 인간들의 오만함에 분노한 신이 이들의 언어를 뒤섞어 사람들을 흩어지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제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서로의 말이 달라 오해가 빚어지게 되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이후 바벨탑은 '말의 혼란'을 의미하는 모티브로서 여러 예술 작품에서 인용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패러디 SF소설로서 인기 높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는 귀에 집어넣으면 어떤 언어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통역기 '바벨 피쉬'가 등장한다.



사실 이 바벨탑은 과거 히브리인들이 고대 도시 바빌론의 거대 지구라트를 보고 만들어 낸 이야기라는 유력한 설이 존재한다. 어쨌든 슈투트가르트 도서관의 갤러리에서 바벨탑을 연상하는 것이 나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건물의 4면 파사드 가장 상단에 '도서관'을 뜻하는 각기 다른 언어의 단어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각 문화권을 대표하는 영어, 독일어, 아랍어와 함께 그중 한 면을 당당히 차지하는 건 한국어로 쓰인 '도서관' 세 글자이다. 설계를 담당한 건축가 이은영 씨가 한국어를 고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출처: stuttgart-tourist.de

사실 Yi Architects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언급한 건축물은 바벨탑이 아닌, 로마의 고대 신전 판테온이다. 갤러리 홀에서 빠져나와 1층의 거대한 공동을 둘러싸고 내려오는 계단을 거닐면 입면에 나 있는 수많은 창들처럼 중앙의 방을 향해 여러 개의 개구부가 뚫려 있다. 판테온에서 영감을 받은 바로 그 공간이다.

계단을 전부 내려와 거대한 입방체의 방에 서면, 판테온의 천장에 뚫린 오쿨루스(판테온 최상부의 원형 개구부)처럼 위층의 갤러리와 맞닿은 천장 조명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이 '오쿨루스'는 슈투트가르트 도서관의 두 개의 공간, 역피라미드 형의 갤러리와 입방체의 중앙 보이드(Open Space)를 분리하는 동시에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출처: wantedinrome.com

로마의 판테온은 모든 신들을 위한 신전으로서 구축되었는데, 가장 높은 부분에 뚫린 '오쿨루스'는 거대한 돔 공간의 유일한 채광을 제공하며 마치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태양과도 같이 극적인 연출을 부가한다.


거대한 중앙 공간의 가운데에 서면 보이드를 둘러싸고 있는 동선과 연결된 수많은 창들이 바닥을 제외한 5면을 둘러싸며 일정한 운율을 형성한다. 작은 소리도 크게 울리는 커다란 공간이 모두의 정숙을 통해 적막을 유지하는 분위기가 기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이 공간은 단순히 4면으로 분산되어 있는 서고 공간을 하나로 묶어줄 뿐만 아니라 서고와 보이드 사이를 가로지르는 동선을 통해 수많은 시선의 교차를 이끌어낸다. 이를 통해 도서관을 이용하는 시민들은 도서관에서의 정숙이라는 에티켓을 지키면서도 같은 공간의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지구라트, 판테온으로 대표되는 고대의 건축물들은 하늘이나 신과 같이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담고 있다. 인간의 신체 스케일을 아득히 뛰어넘는 거대한 스케일의 구축 요소들은 인간들보다는 권력, 신앙 등의 형이상학적 이념을 찬미하기 위해 계획되었다.


그러한 거대건축물들이 현대에 와서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공 공간으로 재해석되는 것이 슈투트가르트 도서관의 가장 흥미롭고도 매력적인 부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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