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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슨생 Aug 05. 2024

탓할까? 고마워할까?

나와 우리 가족만 아는 어린 시절의 기억

 오늘도 아이들과 함께 병원을 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아들은 먼저 일어나서 블록놀이를 하며 놀고 있고 딸은 아직 잠에서 깨질 않았다. 시간이 조금 나서 이렇게 몇 글자를 끄적거릴 여유가 생겼다.

  아이들이 감기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두 달은 된 듯하다. 소아과에서 약만 처방받고 유치원과 집을 왕래하는 일상은 유지하려 했으나 아들과 딸 모두 점차 기침이 심해졌다. 고열 증세를 보였던 3주 전, 쌍둥이들은 결국 입원을 했다. 1주일간의 입원 치료를 통해 발열과 기침 증세가 완화되어 퇴원해지만 다시 비슷한 증세가 반복되어 통원 치료를 하였다. 하지만 증세가 호전되지 않아 다시 입원을 시키기 위해 어제 병원에 방문하였는데 최근 들어 수족구 및 폐렴 환자들이 급증하는 바람에 애들이 입원할 병실이 남아있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딸과 아들은 입원 검사만 하고 팔에는 수액 바늘을 꽂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와이프는 우연히도  이 기간 동안 파트타임 일을 하는 바람에 아이들 병간호는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휴직 기간의 마지막 한 달 반, 하고 싶은 것들은 미뤄둔 채 애들 병시중 하는 시간으로 하루하루를 채우게 생겼다.


  나도 어린 시절에 병원 신세를 자주 졌다. 태어나자마자는 장폐색증을 앓아 수술을 받았다. 수술한 기억은 당연히 없지만 수술 흔적은 아직 내 복부에 남아 있다. 감기와 배탈이 심하여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부터 엄마와 자주 병원을 들락날락거렸다. 초등학교 때는 볼거리로 한번, 발등 골절로 두 번 입원을 하였다. 가장 또렷하게 남은 기억은 중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뇌수막염을 앓았을 때의 일들이다.

2006년에 '성모병원'으로 바꾸고 부산 용호동으로 옮겼다.

  40도가 넘는 열에 두통, 구토 증세가 심하여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 있는 어느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공교롭게도 그 병원은 내가 태어나서 장폐색증 수술을 받았던 곳이었다. 입원 초기에는 열이 내리지 않아 매우 힘들었다. 엄마는 내 병간호를 위해 조그마한 보호자 침대에서 며칠간 쪽 잠을 자야만 했다. 아버지는 엄마가 좀 편히 자게 하려고 물놀이할 때 쓰는 튜브 침대를 병실로 가지고 왔다. 난 속으로 ‘굳이 저렇게 까지 할 필요 있나’ 싶었지만 나름 엄마를 배려했다고 생색내던 아버지가 민망한 감정이 들지 않게 하려고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와 엄마가 자리를 잠시 비웠을 때 함께 입원했던 아저씨 중 한 명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저 중학생 부모 참 유별나네. 애 입원했다고 엄마가 같이 자는 것도 좀 그런데 민망하게 물놀이 침대까지 챙겨 오고 난리야.”

  아저씨는 바로 옆에서 내가 듣고 있다는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혀를 차며 자기 말을 이어갔다. 난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으이그. 아버지는 뭘 그리 오버하고 난리야.’


  어제 쌍둥이들은 입원하였다. 둘 다 열은 있었지만 컨디션이 그리 다운되어 있지는 않았다. 병원 복도에서 수액 폴대를 킥보드처럼 끌고 다니며 떠드는 바람에 내가 일일이 따라다니며 말리고 있다. 며칠 전에 입원했을 땐 둘이 장난치다가 수액 줄이 꼬여서 주사 바늘이 뽑히기도 해서 간호사에게 사죄했는데 다행히 오늘까지는 그런 일은 없다. 그래도 밥 먹고 용변 볼 때 도와주기, 심심하다 할 때 놀아주기를 반복하다 보니 계속 지쳐간다. 긴 병에는 효자도 없지만 좋은 부모가 되기는 더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와이프가 교대하러 와 주는 시간만 목 빠지게 기다린다.

  문득 어린 시절 병원에 입원했던 나를 케어했던 엄마도 나와 함께 병원생활을 하는 것이 그리 녹록하진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보다도 훨씬 열악했던 시설의 병원에서 나 때문에 쪽잠을 자며 숱한 밤을 걱정으로 보냈을 엄마를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에서 미안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엄마는 나보다도 어린 나이에 세상 물정도 모른 채 아버지와 결혼하여 집안일은 물론이고 아버지 공장 일에 시댁과 관련된 온갖 일까지 다 하는 통에 제 한 몸 건사하기 힘든 팔자였다. 게다가 가끔 내가 입원하기라도 하면 엄마 입장에서는 추가 업무가 부과되는 셈이었으니 그 노고가 오죽했을까? 평소 집안일에는 1도 신경 쓰지 않던 아버지도 내가 뇌수막염에 걸려 입원했던 때 아버지는 차마 자기가 병실에 대신 있어주진 못하겠지만 엄마가 고생하는 걸 마냥 지켜만 보기도 미안했을 터. 침대 위에 깔 에어쿠션을 준비해서 엄마가 편히(?) 잘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그때 아버지 나름 최선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때 아버지에게 혀를 끌끌 차던 아저씨에게나 욕할걸.


  날 위해 엄마가 뭘 참았던가 생각해 보니 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의대로 진학하고 싶었던 나는 재수까지 했지만 수능 점수가 애매하였다. 그나마 합격 가시권에 있는 곳이 고신대 의예과였는데 내가 재수하던 당시엔 여기 지원하려면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목회자의 증명서가 필요했다. 이 사실을 안 엄마는 교회를 다니던 엄마의 외사촌 오빠를 찾아갔다. 엄마는 별로 친하지도 않던 먼 친척 오빠에게 가서 나와 함께 며칠간 교회 예배도 참석했다. 불교신자에 가까웠던 엄마의 바람은 오직 아들이 자기 원하는 대로 의대에 합격하는 것뿐이었기에 당신이 처음 겪었던 문화충격을 꾹 참고 견뎠다. 나는 우리 아이들 진학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종교단체에 가서 나 아닌 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해보지 않았던 것은 굳이 안 하는 본능은 나보다 엄마가 훨씬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때문에 억지로 교회까지 갔는데 난 결국 고신대 의예과에 합격하질 못하였다. 이 생각만 하면 엄마에게 항상 미안하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자식을 위해 부모가 베푸는 사랑과 희생은 이기적 유전자 발현에 의한 것이다. 분자 수준에서 작동하는 유전자의 욕구는 대게 개체 수준에서 경험되는 감정적 욕구로 위장되기 때문이다. 아이를 이뻐하며 쓰다듬는 행위도 부모가 자애로운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부모의 뇌 속에서 도파민이 분비되는 보상체계에 의한 본능인 것이다. 하지만 ‘이기적 유전자 이론’은 내가 내 자식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자기가 대단한 부모인 것처럼 과대평가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기억해야 할 본성이라 생각한다. 이기적 유전자 이론은 내가 내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폄하할 수 있는 독소조항인 것은 아니다. 고마움으로 기억되는 추억을 굳이 감동파괴의 낙서로 훼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부모님과 함께 사는 동안 아버지와 엄마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내가 아이 둘을 키우며 이제야 약간이나마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아이를 기를 때 부모 제 성질대로 하지 않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들도 평범한 3~40대 남자와 여자였고 아무리 제 자식이라도 타인이기에 자기 뜻과 다른 모습을 보일 때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 거부감을 내게 거리낌 없이 자주 표출했던 게 좀 아쉽긴 하지만 어쩌겠나. 타고난 유전인자를 바꿀 힘은 내 부모는 물론이고 나에게도 없는 것을.

  누구든지 ‘부모’라는 단어를 떠올린다면 자신과 부모 사이의 관계 맺음을 함께 생각할 것이고, 그 관계 속에서 자식으로서의 기대감이라는 안경을 통해 부모를 바라보는 경향이 크다. 나 역시 태어나자마자 나를 돌보았듯이 성장하는 내내 그저 부모가 나에게 무한히 베풀어주기만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 바람과 괴리가 생길 때마다 나는 그걸 상처로 인식했다. 손주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다가 정작 쌍둥이가 태어나니 단 하루도 우리 애들을 직접 돌봐준 적 없었던 아버지도 그가 내 아버지가 아니라 지나가던 행인이었다면 내게 그렇게까지 미워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일찍이 김국환 아저씨는 노래를 통해 이런 얘기를 한 적 있다.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노장사상까지 엿보이는 노래

  부모로부터 의식주 해결 이상의 도움을 받은 나는 ‘옷 한 벌 이상’의 혜택을 누리며 살았다.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 오면 비에 젖어 사는”삶이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온실의 보호를 받으며 내 삶의 절반 이상을 보내었다. 중년으로 가는 나이에 그나마 이렇게 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유년시절 내 부모덕이 컸었음을 인정한다.

  결혼 이후 아이를 키우며 힘들 때마다 내게 이런 삶을 강요한 부모님을 증오하였다. ‘부모님은 잊어버린 나만 기억하는’ 상처를 떠올리면서 부모님을 원망하였고 힘든 내 상황을 저주하였다. 하지만 ‘나와 부모님이 함께 기억하고 있는’ 내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서 어머니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고 아버지는 산타클로스 그 자체다.

  앞으로도 우리 아이들은 또 아플 수 있고 부모로서 내가 힘들어할 일들도 숱하게 닥칠 것이다. 그때마다 내 아이가 지 뜻대로 안 될 때 떼를 쓰면서 “아빠 때문에 기분이 나빠!”라고 하는 것처럼 그저 내 부모만 탓할것인가? 아니면 아들이 날 힘들게 하지만 오히려 아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기억속 좋은것만 떠올리며 내 안의 도파민 분비를 촉진할 것인가?

   가능한 좋은 생각만 하고

  가능한 좋은 것만 물려줄 수 있는 방법을 더 공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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