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목소리에서 나를 분리하기
지난 글에서 나는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삶의 기쁨에 대해 적었다. 아마도 그 이야기는 나처럼 아이를 키워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지금의 나는 아이가 있는 삶이 참 행복하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혼자 사는 삶이 가장 행복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상황 속에 살고 있고,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을 찾는다. 그러니 자신이 갖지 않은 것을 부러워하거나, 그것을 얻기 위해 억지로 애쓸 필요는 없다. 남의 기준에 내 삶을 맞추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이 모든 ‘개인의 선택’에 너무 많은 말이 따라온다.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아이를 낳았든 안 낳았든, 딸을 키우는지 아들을 키우는지, 몇명이 있는지....사람들은 꼭 한 마디씩 한다.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참견...
“결혼은 해야지.” “아이는 꼭 낳아봐야지.” “딸 하나는 있어야지.” “아들만 있어서 어떻게 하려고.” “애가 둘은 있어야지.” “동성 형제가 좋아.”
이런 말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이런 종류의 조언 속에는 본인의 진심 어린 경험이 담겨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이야기일 뿐이다. '내가 이랬으니 너도 그럴 거야' 라는 전제에서 나온 말들. 모든 사람의 삶을 일반화시키는, 아무런 도움도 안되고 듣는 사람 기분만 찝찝하게 만드는 이야기들.
사람은 누구나 다른 환경 속에서 다양한 성격으로 살아가는데 말이다.
나 역시 30대까지는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에 맞춰 살려고 노력했다. 주변사람들의 기대에 부흥하는 선택과 결정을했다. 머릿속으로는 나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정해진 경로에서 이탈할 때마다 다른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가장 먼저 따라왔다.
결혼을 할 때도, ‘이제는 해야 할 때’라는 막연한 분위기에 결혼을 했다. 운 좋게도 좋은 사람을 만나 자연스럽게 결혼했지만, 만약 상황이 그렇지 않았다면 주변의 참견이 나를 얼마나 힘들게 했을지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힌다.(결혼준비 역시 남들 하는만큼! 좋아보이게! 가 매우 중요했다. 그때 했던 쓸데없는 지출을 지금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을 했으니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첫 아이를 계획했다. 별 문제 없이 아이를 갖게 되어 다행이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을까.
둘째를 가질 때는 첫째와 같은 딸이길 바랐다. 동성 형제가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솔직히 실망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남매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럽다. '남매는 나이 들면 소원해진다' 라는 말을 무수히 들었지만, 그것 역시 집안 분위기와 관계의 질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자매라도 남보다 못한 사이도 많으니까 말이다.
이렇듯 한국에서 가족, 결혼, 육아, 학업 등 ‘삶의 크고 작은 결정들’에 대해 훈수를 두는 문화는 매우 강하다. 특히 나처럼 예민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참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한국을 떠나기 전까진 그게 고통이라는 것도 잘 몰랐다. 내 목소리를 어떻게 내야하는지도 모르고, 스트레스만 받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이 방식이 맞습니다. 나는 이렇게 할 것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그 말을 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아주 잘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내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길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때로는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훈련이기도 하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때로는 귀를 닫고, 마음을 단단하게 지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세상의 목소리에 휩쓸려 나를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사람은 경험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니 다른사람이 경험할 때까지 제발 그냥 놔두자. 그러다가 누군가 조언을 구한다면, 그 때 한마디 건내주면 어떨까?
'나는 이랬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다를 수도 있어요. 참고만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