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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새 Nov 19. 2023

느리더라도, 유연하게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병일 시인의 ‘어디인지 모르지만, 길을 찾아’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똑바로 서있는 것은 굳었거나 죽은 것이다…

저 민달팽이는 곡선의 힘으로 계절과 계절을 걷는다”





내 나이 스물 하나,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주관균형자유였다.




“너는 무엇을 할 때 가장 심장이 뛰어?”라는 누군가의 질문은, 막연히 느끼고만 있었던 나의 소망을 툭 건드렸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할 때에 심장이 뛰는지 한 번도 찾아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다재다능해, 이것저것 잘하는 게 참 많아.라는 말은 무수히 들어왔다. 재수 없게 들릴 수는 있지만 그 말은 내 귀에 ‘너는 깊이가 없어’라는 말로 들렸다. 이것저것 얕게 잘하는 건 많았지만 무엇 하나 나에게 뚜렷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주관, 나만의 리듬을 찾기로 결정했다. 우선 전 세계 어느 곳을 가든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악기’가 하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음악은 universal language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학원에 간 날, 드럼 선생님은 나에게 ‘엇박’ 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정박이 아닌 엇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니. 세상은 언제나 나에게 정답을 요구했는데 말이다. 수능에서도 나는 5개의 문장 중 ‘가장 적절한’ 하나만을 골라야 했고, 대학 원서를 쓸 때도 나의 성적과 생활기록부에 가장 ‘적절한’ 대학과 학과를 골라야 했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스펙을 만들기 위해 토익과 자격증, 인턴을 지원해야만 했다. 그런데 엇나가는 박자가 제일 중요하다는 선생님의 말은 의외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날기를 포기하고 차라리 정해진 규정의 손길에 붙잡혀 보행자의 길을 걷기를 선택하는 거야. 하지만 자넨 안 그렇지. 자넨 계속 날아오르고 있어. 씩씩한 청년에게 어울리는 방식이지… 자넨 차츰 스스로 날기를 통제할 수 있다는 그 경이로움을 발견하고 있어. 섬세하고도 작은 독자적인 힘, 하나의 신체기관, 하나의 방향키가 자네를 계속 이끌어가는 그 거대한 보편적인 힘을 향해 나아가는 걸 말이지! “ – 데미안은 아프락사스를 향해 나아가는 싱클레어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나는 싱클레어처럼 나의 내면에서 내가 앞으로 나아감을 보았다. 대지를 울리는 그 악기는 엇박으로, 천천히 나의 심장을 뛰게 했다. 오롯이 내 힘과 시간으로 만들어내는 음악이, 스틱 움직임 하나하나가 만들어내는 타격감이 짜릿했다. 참고로 드럼을 하다 보면 사지가 분리되어 따로 노는 기분이 종종 든다. 킥으로 기본 박자를 맞추며, 엇박으로 움직이는 양손의 컬래버레이션이 처음에는 신체적으로 어색했지만, 4비트에서 8비트, 16비트, 셋잇단음표까지 어려운 단계를 연주해 낼 수 있게 되며 나의 근육들이 만들어내는 리듬의 힘을 알아갔다.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던 때에는 절대 느껴지지 않던 심장의 미세한 떨림과 설렘, 그리고 오롯이 나의 두 손이 이루어 내는 박자가 경이로웠다.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잘할 수 있는지 알았고 빈틈을 찾아 메울 수 있는 용기를 지니게 됐다.

 


두 번째로 나는 ‘균형’을 배우고 싶었다. 어떤 이슈에 대해 책을 한 권 읽은 사람과 여러 권 읽은 사람 중에서 더 위험한 사람은 딱 한 권만 읽은 사람이라고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Eco chamber’라는 작은 비눗방울에 갇혀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편협한 사고를 하게 된다. 특히 소셜미디어가 이용자 맞춤 서비스를 더욱 강화할수록, 개별 사용자가 접하게 되는 정보들은 매우 한정적이고 동질적이라는 특징을 갖게 된다. 그렇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의 교류가 부재하고, 자신의 생각만이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만연한 사회가 완성되었다. 타인을 적으로 간주하고 경쟁 상대로 인식하는 사상은 성별 간 갈등, 세대 간 갈등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유튜브의 ‘사이버렉카’ 들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특정 이슈에서의 동질감을 형성하여 대중의 심리로 장난을 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편견과 혐오를 팔아서 돈을 벌고, 이해관계자 간의 거리를 증폭시켜 갈등을 조장한다. 이미 특정 공감대를 형성한 집단의 환심을 사는 것은 너무나 쉽다는 걸 잘 안다. 나는 이런 콘텐츠의 파도 속에서 휩쓸리고 싶지 않았고, 영리한 사람들을 위주로 움직이는 사회를 조금이나마 바꾸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책을 읽었다. 2021년을 마무리해 가던 즈음에, 마침 감사하게도 나와 결이 잘 맞는, 따뜻한 친구를 만나 세상을 나눌 수 있었다. 나는 나에게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을 동경하는데, 그는 찰나의 삶의 순간들을 예민하게 호흡하고 본인만의 뚜렷한 주관을 논리적으로 말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권씩 좋은 책을 읽었다. 같은 구절에서 감동하기도 하고, 같은 부분에서 대립되는 생각들을 나누었다. 세상의 반대되는 개념들을 이해하면서 이 세계의 혼란스럽고 다양한 특징들을 받아들였다. 결국 우리가 세 달 뒤에 깨달은 것은 ‘세계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의 변화가 궁극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체계’라는 것이었다. 우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며 , 인간 사회에서 사회적 격차가 꼭 필요했을까? 에 대해 이야기했고, 발전에 있어서 격차는 필연적이지만 그 과정에서 인권을 침해하거나 보편적인 도덕에 어긋나는 불필요한 차별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제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동의했다. 그리고 예측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선’과 ‘악’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며, 니체의 이론에서의 모순점을 함께 찾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저녁이면 바다는 한숨을 쉬며 장미빛깔이었다가 자주나 포도주 빛깔이나 짙은 푸른색으로 변하곤 했다.’와 같은 찬란한 문장들에 전율했다. 그럼에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다소 과하고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문체에서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함께 더 나은 표현을 찾아보기도 했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묘사를 마치 격 높은 ‘예술’인 것처럼 포장하려고 하는 몇몇 표현들을 비판해보기도 했다. 이어서 조르바와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를 비교하고, <이방인>에서는 우리 자신을 이방인으로 만드는 사회의 모순을 찾았다. 그리고 마지막 화룡점정인 <유리알 유희>에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헤르만 헤세의 노년기를 찬찬히 짚었다. ‘절대적이고 완전한 가르침’ 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안정과 질서는 스스로 창조해 나가는 것임을 알았고, 관념들의 투쟁을 통해 협주곡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임을 알았다. <싯다르타>와 <데미안>에서는 주인공이 현실세계에서 고난과 역경과 부딪히며 성장하는데, <유리알유희>에서는 주인공이 좀 더 정제되고 성숙된 태도로 ‘초월’을 극복해내고 있었다. 이렇게 독자의 입장이 아닌 저자의 입장이 되어 스토리를 바라보니 ‘균형’이 보였다. 우리가 읽은 고전에는 지혜가 담겨있었다. 우리는 열다섯 권의 책을 읽으면서 파울로 코엘료는 헤르만 헤세에게, 헤르만 헤세는 니체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마치 인드라망처럼 모든 것이 엮어있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알게 됐다. 내가 영감을 얻는, 그 어떤 책이 주는 메시지에도 ‘절대적인’ 것은 없음을!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 없는 법이다. 사고하는 힘을 길렀고, 충동과 욕망에 의해 휘둘리지 않는 법을 깨우친다. 분별의 힘은 앞으로도 꾸준히 길러나갈 것이다.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내가 책을 읽으며 느꼈던 것들 - 자발적이고 근원적인 행동의 힘을 키울 것, 무지성과 무비판으로 침묵하지 않을 것, 그리고 절제와 균형을 지킬 것. 




마지막으로,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은 ‘자유’였다. 나는 글을 쓰며, 여행을 하며 자유를 찾았다. 우선 글에 관해서는 –내 인생의 긍정적인 변곡점이 되었던 이별 이후에 글을 많이 쓰기 시작했다. 헤어지고 나서 인간관계에 대한 시야가 넓어졌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의 크기를 계산하지 않으며, 사람마다 가지는 고유한 특성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에게 익숙한 인간관계의 프레임으로 어떤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속세적인 용어로는 MBTI와 같은 유형으로 사람으로 재단하지 않으려고 했다. 우리 사회는 너무나 극단에 처하는 상황을 좋아해서 사람을 일차적으로 감별하고 예측하는 행위에 너무나 익숙하다. 그 관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소유의 개념과는 별개인 사랑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귀한 면모를 인정해 주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비로소 관계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고 순수히 나의 힘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 시기와 책을 읽는 시기가 맞물려서, 한창 머릿속에는 생각주머니가 가득했다. 충만하게 느낀 감정들을 글에 녹여내니, 그제야 머릿속을 얼음장같이 시원한 물로 씻어내는 기분이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말을 곱씹으며 나는 이런 깨달음들을 블로그에 고스란히 담는다. 나만의 단어들을 조합하고, 메시지를 담는다. 두 번째로는 혼자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여행은 숙소 예약부터 코스와 콘셉트를 고르는 것까지 오직 나의 힘으로만 해내는 것들의 집합체이다. 부모님의 안정된 울타리에서 벗어나, 돌을 던져 파장을 일으키고 변화를 시도했다. 비로소 나는 날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기분이다. 이제 천천히 날아오르려고 한다! 


나의 세 가지 욕망들을 갖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내 생각과 예감들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묻는다면 나는 희미한 수채화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대답할 것이다. 수채화처럼 물과 융화되지만 그 빛깔은 잃지 않는 사람. 이렇게 나의 성장을 곱씹는 것은 희열이다. 타인의 언행과 태도, 색깔에 쉽게 물들어버리던 예전의 나에게서 벗어난 지금 여기의 현실은, 너무나 자유롭다. ‘곡선의 힘으로 계절과 계절을 걷는’ 민달팽이처럼 곡선의 몸으로 올곧게 이 세상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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