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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중앙의 두 나무(2)

생명나무와 선악을 아는 나무

동산 중앙의 두 나무(2)

저는 에덴동산 중앙에 두 나무가 있다는 이야기에서 두 가지 메시지를 읽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삶)과 선악이라는 메시지이고, 또 하나는 생명과 선악을 아는 지식 모두 내 안에 있지 않고 내 밖에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1. 이제 두 번째 메시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생명나무 부분부터 보지요.

저는 지금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 몸의 심장이 뛰고 모든 세포들이 살아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몸을 움직이고 생각을 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만일 지금이라도 제 심장이 멈춘다면 얼마 안 있어 몸의 모든 세포가 죽을 것이고, 저는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게 될 겁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생명이 제 안에 있다고.


2. 맞습니다. 생명은 몸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1차적 사실에 불과합니다. 1차적 사실을 더 파고 들어가면 전혀 다른 진실이 보입니다. 내 생명은 내 몸 안에 있지 않다, 내 손아귀에 있지 않다, 오히려 내 밖 저기에 있다는 진실이 보입니다.


조금만 살펴보세요. 하나의 개체 생명은 결코 그 개체 생명에서 비롯되지 않았습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 고래 한 마리, 호랑이 한 마리도 개체 생명에서 비롯되지 않았어요. 저와 당신 역시도 그렇고요. 제 생명은 순전히 저를 낳아준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비롯됐습니다. 제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순전히 저를 낳아준 어머니 아버지 덕분이고, 저를 둘러싼 가족과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 덕분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수많은 먹거리 덕분이고, 수많은 먹거리를 내주는 자연 덕분입니다. 바로 이것이 엄정한 생명의 진실입니다. 내 생명은 내 안에 있지 않아요. 내 밖 저기, 에덴동산 중앙에 있습니다.


3. 이제 선악을 아는 나무를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어느 정도 선악을 압니다. 어린 아이도 주변 사물과 상황을 인지하는 능력과 함께 선악에 대한 감각을 얻습니다. 그래서 이 행동을 하면 엄마가 좋아할지 싫어할지를 어느 정도 압니다. 물론 사회적 학습을 통해 습득하는 부분도 많지만 사람 속에 양심이라는 게 있어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선악에 대한 감각을 체득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자기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4. 그러나 이것은 선악을 아는 것의 1차적 사실에 불과합니다. 1차적 사실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전혀 다른 진실이 보입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은 결코 내 양심에 있지 않다, 내 손아귀에 있지 않다, 오히려 내 밖 저기에 있다는 진실이 보입니다.


조금만 살펴보겠습니다. 방금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죽인 사건이 벌어졌다고 해봅시다. 법적으로는 분명 살인이고, 도덕적으로는 분명 악입니다. 그러나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죽인 정황을 들여다보면 단순한 실수부터 정당방위까지, 불시의 성폭력부터 오랜 세월 얽히고설킨 애증관계까지, 일대일 이해(利害)부터 국가적 이해까지 관계의 그물망이 그야말로 복잡합니다. 연명치료 중단이나 안락사 문제도 일견 단순해보이지만 그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질 경우의 수를 꼽아보면 거의 무한대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어떤 일이나 행동의 선악을 판단하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선악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관계에서 발생하는 관계적 개념이고, 세상만사가 하나의 원인에서 발생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요인들이 수도 없이 얽히고설켜 발생하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선악을 제대로 판단하려면 얽히고설킨 모든 관계의 그물망을 촘촘히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애당초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은 부분적 존재이기 때문에 관계의 그물망을 다 파악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고, 관계의 그물망을 다 파악하지 못하는 한 선악을 아는 지식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선악을 아는 지식이 내 안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생명이 내 안에 있지 않듯 선악을 아는 지식 또한 내 안에 있지 않아요. 내 밖 저기, 에덴동산 중앙에 있습니다.


5. 에덴동산 중앙의 두 나무가 전하는 이 메시지는 성서에서 계속 반복됩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은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나무가 있다는 이야기를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다시금 설파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15:5).

바울 역시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을 아는 나무가 있다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찬미로 바꿔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부요하심은 어찌 그리 크십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어찌 그리 깊고 깊으십니까?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려 알 수 있으며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길을 더듬어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롬11:33)


6. 사실 성서의 모든 이야기는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두 나무 이야기의 변주입니다. 아담 이야기, 노아 이야기, 모세 이야기, 다윗 이야기, 예수 이야기,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야기가 다 고유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두 나무 이야기의 변주이고, 그 모든 변주의 주 선율은 아주 단순합니다.

[세상(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과 선악의 문제다. 우리가 생명살이(살림살이)를 하느냐 죽음살이(죽임살이)를 하느냐는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생명의 진짜 주인은 내가 아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의 진짜 주인도 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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