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멈추고 차 트렁크가 열린다. 사람들이 몰려와 트렁크에 있는 가방을 먼저 잡으려고 아우성이다. 그중 한 사람이 운좋게 가방을 꽉 잡고 나를 쳐다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썰물 빠지듯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새벽 팀이 지나간 오전의 필드는 한가하다. 오늘은 여유있게 쳐도 될 성싶다. 내 차례다. 몇 번의 연습 스윙을 하고 공을 친다. 캐디가 ‘나이스 샷’이라 말하고는 카트를 끌며 맨발로 바삐 걸어간다. ‘와우, 첫 타부터 느낌 좋은데!’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이만하면 만족스런 샷이다. 나는 앞서가는 캐디에게 고맙다는 손짓을 하며 캐디 뒤를 따라 여유로이 공이 날아간 쪽으로 걷는다. 이곳은 ‘델리 골프 클럽’ 이다.
2011년 여름부터 6년 간 나는 인도의 뉴 델리에서 살았다. 도착하여 한동안은 인도식 생활법에 적응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남편과 나만 지내는 집에서 시간은 남아돌았고 남편은 회사일로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 ‘Time in a bottle’이란 팝송이 절로 생각나는 하루하루였다. 그러다 집 근처 ‘델리 골프 클럽'을 알게됐고 남는 시간을 골프에 쏟아붓기로 했다.
회원이 되고 며칠 뒤 라즈싱이란 남자가 내 캐디가 되었다. 인도의 골프장 캐디는 모두 남자들이다. 당시 이들은 한 번의 라운딩에 만원 정도의 캐디비를 받았는데 외국인의 경우이고 인도인은 그보다 적게 준다고 들었다. 라즈싱은 여느 캐디랑 달리 영어를 곧잘했고 라운딩 중 잘못된 내 샷을 고쳐줄 만큼 골프를 잘 쳤다. 라운딩이 끝나고 돈을 주는데 그는 내 전속 캐디를 하고싶다고 했다. 일당 대신 월급을 주면 나만의 캐디로 일하겠다는 것이었다. 괜찮은 제안이었다. 그렇게 해서 라즈싱은 내 고정 캐디가 됐다. 그날 이후 내 차가 골프장에 들어서면 라즈싱이 나를 맞았고 다른 캐디들은 더 이상 내 차로 모여들지 않았다.
평일에는 일인 플레이도 가능해 거의 날마다 골프장에 갔다. 골프도 골프지만 이 곳을 걷기만 해도 과거 속으로 빨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새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늦은 오후의 골프장은 고즈넉하니 운치가 있었다. 델리 골프 클럽은 100여 년 전 영국 식민시절 세워진 골프장이었다. 골프장 한가운데 400여 년 된 무굴제국 유적이 붉은 노을을 뒤에 두고 서있는 풍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골프장의 숲에서는 사슴이 가끔 튀어나왔다. 그들은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해서 나를 놀랬켰는데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숲이 줄어들자 먹을 것을 찾으러 나온다고 했다. 새끼 사슴이랑 엄마 사슴이 나란히 어슬렁거리기도했다. 델리 골프 클럽의 또하나 볼거리는 공작새였다. 주로 벙커 근처에 모여들었는데 사람들이 다가가도 태연했다. 수컷 공작이 보란듯이 꽁지 깃을 펼치고 빙빙 도는 모습은 화려하고도 현란했다. 나같은 외국인이 신기해 하는 걸 알고는 주운 공작 꽁지로 흥정하는 캐디도 있었다. 그에 반해, 옛 영광과 울창한 숲과 잘 다듬어진 잔디가 깔려있는 골프장의 바깥 담벼락은 움막을 치고 사는, 길바닥에서 세수도 하고 용변도 보는 걸인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담사이로 존재하는 두 세상. 모두 인도의 얼굴이었다.
봄이 되면 델리 골프 클럽은 일꾼들로 붐볐다. 겨우내 마른 땅에 잔디를 새로 심고 비료를 뿌리고 죽은 나무 가지를 쳐내기 위함이었다. 잡초는 여자들이 뽑았다. 이들은 알록달록한 인도 전통 옷에 값싼 팔찌를 주렁주렁 차고있었다. 멀리서 보면 초록 잔디에 울긋불긋한 색상이 도드라져 그림처럼 보였다. 하지만 가까이 가보면 뜨거운 햇볕 아래 쭈그리고 앉아, 흙투성이 맨 손으로 풀을 뽑으며 막노동을 하는 중이었다. 라즈싱은 담배를 입에 물고 지나가며 이 여인들에게 힌디어로 몇 마디 농을 던졌다. 그러면 아낙네들은 뭐라고 대꾸하고는 깔깔대며 웃었다. 측은지심이 든 내 자신이 무안할만큼 이들은 밝았다.
라즈싱은 골프장을 꿰고있었다. 붐비는 홀은 건너뛰고 한가한 홀은 잘도 찾아냈다. 나는 라즈싱이 이끄는 대로 신이 나서 골프장을 종횡무진 돌아다녔다. 우기때가 되면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멀쩡히 맑다가도 소나기가 퍼부었다. 골프치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라즈싱은 비의 속성도 잘 알았다. 지나가는 비니 나무 밑에서 기다리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그의 말은 대부분 맞았다. 사람들이 사라지고 텅빈 골프장에서 나는 비에 젖은 옷차림으로 전두환 골프를 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가끔 나는 라즈싱과 내기를 했다. 그는 피칭웨지 하나만으로 치고 나는 평소처럼 쳤다. 그래도 그는 나보다 잘 쳤다. 라즈싱은 골프 렛슨도 자청했다. 라운딩을 하고나면 나는 연습장에 가서 라즈싱의 코치를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델리골프 클럽에서 반 세월을 보낸 라즈싱은 나에게 다른 멤버들을 소개해줬다. 한국마담, 일본마담, 인도마담 인도젠틀맨 등등. 인도인 멤버들과 함께 늙어가며 캐디일을 하는 라즈싱은 멤버들의 사생활 이야기도 슬쩍 흘리는 서비스도 가끔 해주었다.
일년에 한 두 번 골프장에서 주최하는 캐디끼리의 골프시합이 있었다. 라즈싱은 남편의 골프채를 빌려서 대회에 참가했다. 빌린 골프채로 라즈싱은 등수에 들어 상금을 탔다. 한번은 2주 간 다른 캐디를 쓰면 안되겠냐고 청했다. 지방에서 열리는 골프대회에 인도 선수의 캐디로 가게된 것이었다. 골프대회는 예선을 거친다해도 1주일이면 끝난다고 알고있는 터라 왜 2주일이나 걸리는지 물었다. 그의 대답이 기가 막혔다. 선수는 비행기를 타고 가고 자기는 기차를 타고 가기때문이라 했다. 기차로 오고가는데만 1주일이 걸린다는 말이었다. 라즈싱은 사흘을 기차타고 내려갔다가, 시합이 끝나고 다시 사흘동안 기차타고 델리로 돌아왔다. 라즈싱이 없는 사이에 그의 친구가 내 캐디가 돼주었다. 다리에 장애가 있는 그 친구는 내가 친 샷이 맘에 안들면 혀를 차곤했던 라즈싱과 달리 조용했다. 2주 후에 돌아온 라즈싱은 피곤한 기색도 없이 나를 보자 반가워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받았다고 천진하게 웃었다.
어느 날 라즈싱은 딸이 결혼을 하는데 결혼 지참금이 부족하다며 몇 달치 월급을 미리 주면 안되겠냐고 겸연쩍게 말했다. 사실 한 달 월급이라고 해야 얼마 안되는 금액이었다. 나는 몇 달치 월급과 결혼 축의금을 봉투에 넣어주었다. 라즈싱은 40대 중반이었는데 지금의 나만큼 늙어보였다. 평생을 뙤약빛이 내리쬐는 골프장에서 일을 한 탓이었다. 그에게는 골프 선수가 꿈인 아들이 있었는데 오토바이 사고로 몇 년 전 세상을 떴다고했다. 그 아들은 라즈싱이랑 같이 델리 골프클럽에서 캐디로 일했었다고 다른 캐디가 귀띔해 주었다.
시간 죽이기로 시작한 델리에서의 골프 여정은 나에게 뜻밖의 즐거움을 선사했고 인생을 곱씹게 해주었다. 나는 인도를 떠나기 하루 전 날까지 골프를 쳤고 라즈싱을 비롯한 다른 캐디들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짜파티 몇 조각으로 하루를 살아가지만 주어진 여건을 불평없이 사는 그들을 보며 나는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 질문을 가슴에 안고왔다 . 잊지못할 추억을 준 라즈싱과 델리 골프 클럽이 그립다. 부디 코로나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
(202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