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수도인 뉴델리로 이사 와서 처음 읽은 책이 <화이트 타이거>였다. 그곳에서 알게 된 친구가 인도를 알려면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강추해서 읽었다. 인도 작가 아라빈드 아디가가 2008년에 발표한 첫 소설인데 같은 해에 맨부커상을 받았다. 그 책을 영화로 만든 <화이트 타이거>를 넷플릭스에서 봤다. 뉴델리의 거리풍경과 낯익은 ‘조르바그' 동네를 화면에서 대하니 반가운 한편 적나라한 인도의 모습에는 안쓰런 마음도 들었다.
십 년 전 인도는 현금만 통용됐다. 가계수표도 쓰긴 했지만 드물었다. 시장에서나 식당에서는 으레 캐시만 받았다. 어느 날 운전기사인 카시미라가 낯이 하얘져서 왔다. 집 근처 야채가게로 심부름을 보냈는데 빈 손이었다. 장을 보고 오백 루피를 내니 가게 주인이 위조지폐라고 돌려줬다면서 나한테서 받은 돈을 내밀었다. 고액권인 오백 루피는 어느 상점에서나 불빛에 돈을 비춰 진짜인지를 먼저 확인했다. 나도 그들처럼 가지고 있던 다른 오백 루피와 가짜 돈이라는 지폐를 번갈아가며 허공에 대고 비쳐봤다. 아닌 게 아니라 뭔가 달라 보였다. 말로만 듣던 위조지폐를 처음 보았다. 며칠 전에 주유소의 현금인출기에서 찾은 돈이 가짜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신고를 해야겠다 하니 카시미라는 위조지폐를 지녔다고 경찰에게 추궁당할 일이 두렵다며 겁먹은 표정이었다. 경찰서에 가면 이러저러 일이 커지는 게 번거로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찜찜한 기분이 며칠은 갔다. 마하트마 간디 얼굴이 그려진 오백 루피짜리 지폐는 우리 돈 만 원정도였는데 그 가치는 꽤 컸다. 많은 인도인은 하루 벌어먹고사는 형편이라 은행 통장이 없었다. 우리 집 가사도우미와 운전기사의 월급날이 되면 남편은 은행에서 오백루피를 다발로 찾아 그들에게 월급을 나눠 줬다. 네팔인인 마야는 가사도우미로 번 돈을 고향의 가족에게 보냈다. 인도 북부출신인 카시미라도 홀로 생활하며 집에 돈을 부쳤다.
‘Incredible India’. 인도관광청이 내세우는 관광 슬로건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무시로 벌어지는 나라가 인도임을 살면서 실감했는데 구호 하나는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을 했다. 찢어지거나 귀퉁이가 날아간 지폐는 흔했다. ( 우리나라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거스름 돈을 집에 와서 살펴보면 절반이 날아간 반쪽 지폐가 멀쩡한 돈 사이에 껴있어 황당했던 일도 있었다. 돈을 메모지로 여기는지 온갖 숫자와 글씨로 지저분해진 지폐도 많았다. 외국에 살면서 여러 나라의 화폐를 써 왔지만 누렇게 바래서 후줄근한 인도 지폐를 보고 ‘돈의 뒷조사를 해보고 싶다’고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그 너덜너덜한 돈이 내 손에 쥐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쳤을까, 얼마나 그것 때문에 웃고 울었을까, 돈에는 온갖 사연이 숨어있을 것만 같았다. 만약 청결도로 돈의 순위를 매기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싱가포르 달러를 일등으로 하겠다. 나라 이미지만큼 싱가포르 지폐는 세탁소에서 갓 나온 것처럼 깨끗했다. 싱가포르에서 살 때 운동하러 갈 때면 이십 달러짜리 한 두 장을 운동복 포켓에 넣어 다녔는데 돈이 하도 빳빳하고 접히지가 않아 돌돌 말아서 넣어야 했다.
감자와 양파는 인도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식량이다. 도시 빈민들은 통밀로 만든 짜파티 몇 조각에 양파를 날로 곁들여 한 끼를 때웠다. 운 좋은 날이면 감자와 양파를 넣어서 만든 카레를 먹었다. 인도에서는 양파값이 뛰면 폭동이 일어난다는 말이 있다. 영화 <화이트 타이거>를 보면 주인공이 모시는 사업가가 자동차 트렁크에 오백 루피 지폐로 가득 찬 양파 자루를 싣고 유력 정치가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에서는 십오 킬로짜리 사과상자가 뇌물 비리 뉴스에 곧잘 등장했던 기억이 떠오르며 나라마다 뇌물을 담는 도구가 제각각임에 쓴웃음이 났다. 2016년 모디정부는 ‘부패와 검은돈'을 뿌리 뽑겠다며 하룻밤사이에 기습적으로 화폐개혁을 해치웠다. 갑작스럽고 느닷없는 상황에 인도경제가 마비될 만큼 온 나라가 휘청거렸다. 한 달이 넘도록 은행 앞은 구 화폐를 신권으로 바꾸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쳤고 시내의 현금인출기는 하루가 멀다 하고 먹통이 됐다. 나도 예외 없이 새롭게 단장한 마하트마 간디의 초상이 찍힌 신권을 찾아 도시를 헤매고 다녔다.
한 달에 두어 번 시내에 위치한 INA 시장에 갔다. 동네 가게에 비해 비싸지만 신선한 배추를 파는 곳이 그곳밖에 없었고 야채와 과일의 종류가 다양하기도 해서였다. 시장 안 단골 야채 가게를 가기 위해서는 몇 개의 허들을 통과해야 했다. 생선가게가 첫 번째 도전이었다. 진열된 생선 위에 새까맣게 붙어있는 파리떼와 비린내를 외면하며 재빨리 지나치기. 자칫 땅바닥에 고인 생선 핏물에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걷기. 닭장에 갇힌 닭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이 뿜어내는 분비물 냄새에 숨을 참으며 닭집 앞을 지나가는 것도 고역이었다. 구걸하며 쫓아오는 어린 거지들을 내치는 행위는 내 연민을 시험했다. ‘아후자' 채소가게는 한국 아줌마들 사이에 입소문이 난 곳이었다. 가게입구에는 시든 잎을 뜯어내 쪼그라든 배추가 진열돼 있었다. 주로 뜨내기 손님들이 샀다. 한국 사람이 가면 싱싱한 배추가 쌓여있는 가게 뒤편으로 안내했다. 그곳 점원들은 한국사람에게는 한국말을 했다. “부추 싱싱해요. 갓 있어요.” 가게로 들어가니 종업원이 대바구니를 집어 들고 잽싸게 다가왔다. 내가 필요한 야채를 손으로 가리키면 점원은 그것을 집어 대바구니에 담았다. 바구니가 차면 가게 한구석에 밀어 넣고 빈 바구니를 가져왔다. 보통 대바구니 서너 개가 필요했다. 넓지 않은 가게는 손님들로 붐볐지만 직원들의 일처리는 빨랐다. 내가 다 샀다는 시늉을 하자 귀에 볼펜을 꽂은 주인이 계산서를 들고 나타났다. 점원이 바구니에서 야채를 종류별로 꺼내 막대 저울에 올려놓고 힌디어로 말하면 아후자 사장님은 계산서에 영어로 품목을 적고 가격을 써 내려갔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손발이 척척 맞는 모습은 영락없이 우리나라 만담의 명콤비 장소팔과 고춘자였다. 받아쓰기가 끝나자 주인은 암산을 했다. 스무 가지가 넘는 항목을 눈으로 두드리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몇 초였다. 내가 손으로 길게 쓴 계산서를 받아 들며 놀라워하자 그는 별 표정 없이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았다.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아 휴대폰으로 계산을 해봤더니, 역쉬! 나는 엄지를 한번 치켜올리고 돈을 건넸다. 아라비아 숫자 원조국의 후예답게 인도인은 구구단이 아닌 십구단을 외운다니 ‘암산 그 까이꺼!’인가 보았다. 인도 상인들이 계산기를 쓰지 않고 수기로 영수증을 쓰는 모습이 처음에는 희한했으나 시간이 지나니 당연하게 보였다. 구글 회사의 CEO가 인도출신인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1년 여름 인도에 갓 도착하여 살 집을 구하러 다녔다. 부동산 중개인이 조르바그 동네를 보여주며 브이브이아이피들이 사는 곳이라 전기가 나가는 일이 절대 없다며 자랑스레 말했다. 전력이 부족한 인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기가 끊어져 각 집에서 자가발전기는 필수였다. 다른 동네에 살게 됐지만 다행히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낭패를 본 적도, 집 옥상에 있는 물탱크가 고장 나서 씻지도 못하는 불상사 없이 인도 생활을 잘 마무리했다. 내 어린 시절 가난했던 우리나라와 닮은꼴 인도는 칠십 오 년 전 한국전쟁 때 남한을 도우려고 자국의 젊은이를 파병했다. 2011년 쯤, 전쟁에 참전했던 한 병사가 나이 구십이 되어 자식과 손주를 이끌고 뉴델리 한국대사관에서 주최한 개천절 기념행사에 왔다. 그의 양복에는 자랑스런 훈장이 달려있었다. 과연 인크레더블한 인도이다. (2021.11)
#인도#뉴델리#화이트타이거#화폐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