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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Sep 06. 2023

2023년 여름 캘리포니아에서 보고 겪고 느낀 몇 가지

  모처럼 하늘이 흐리다. 아침에 잠이 깨자 집을 나선다. 기차 경적 소리가 크게 들렸다가 사라진다. 어느 쪽으로 돌까 망설이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커플이 길건너에 보인다.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옆집 앞마당은 선인장 여러 종류가 심어져 있고 건너 집 앞은 정성스레 가꾼 손길이 느껴지는 노랑, 하양, 핑크색 장미나무가 서있다.  집 모양도, 앞마당의 화초들도 집의 담장이 없는 것만 빼고 제각각이다. 조화롭고 평온한 평일의 주택가다. 길가에 서있는 차들 중에 NEKO1이라고 쓰여진 차 번호가 눈에 들어온다. 네코는 일본말로 고양이라는 뜻이다. 차주가 일본인인가 생각하며 차를 한번 더 본다. 동네를 탐색하며 걷는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지난 한 달여간의 캘리포니아 생활이 벌써 아득하게 느껴진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구한 집에서 묵고 있다. 이층짜리 집으로 중국인 주인은 이층에서, 남편과 나는 출입문이 따로 있는 일층에서 지내고 있다. 마트와 편의 시설이 가까이 있고 무엇보다 아들 집이 근처라 같은 집에서 두 번째 묵게 됐다. 어제는 주인이 낯선 여자분과 함께  집에 들렀다. 지난번에 왔을 때 집주인이 맞은편에 한국 가족이 산다며 소개해 주겠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남편이 주재원으로 이 곳에 와서 살고 있다는 그분과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오지랖 넓은 중국인 주인 덕분에 뜻밖에 한국인 이웃이 생겼다.


  캘리포니아에 온 지 보름쯤 됐을 무렵 스탠퍼드대학교의 빙콘서트홀에서 합창공연을 봤다. 스탠퍼드 음대에서 주관한다고 해서 합창단들이 젊은 학생일 거라 생각했다. 웬걸, 합창단원들이 줄지어 무대로 나오는데 젊은 층부터 머리가 하얗게 센 사람까지 여러 세대가 조화롭게 섞여있었다. 옷차림이 볼 만했다. 턱시도로 빼입은 단원이 있는가 하면  티셔츠를 입은 남자도 보였다. 여자 단원의 경우에는 레깅스 차림과 엄숙한 드레스 차림의 대비가 인상적이었다.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복장이었지만 검은색의 통일된 색감은 조화로웠다. 알고 보니 이들은 스탠퍼드 음대에서 후원하는 아마추어 합창단들이었다. 일류 프로의 솜씨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진지하게 한곡 한곡 부르는 모습에 열심히 박수를 쳤다.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공연의 테마였다.  1960년대의 팝송 ‘캘리포니아 드리밍’은 춥고 배고픈 현실을 벗어나 햇살 가득한 캘리포니아로 떠나고 싶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공연은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부르며 시작되었다. 솔로 소프라노는 어느 멕시코 여성의 삶을 노래했다. 그녀는 목숨 걸고 국경을 넘어 갖은 고생 끝에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노래는 그녀의 처절한 삶을 묘사했다. 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졌고, 앞자리의 관객은 눈물을 흘렸다. 멕시코 여성의 삶을 들으며,  1970년대에  자식에게 자신보다 나은 삶을 안겨 주기 위해 하루 12시간 이상 세탁소와 도넛 가게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했던  한국 이민자들이 떠올랐다. 인종, 피부색, 종교, 국적, 성별, 성적 지향, 장애 등에 대한 차별을 법으로 금지한 캘리포니아. 오늘도 사람들은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좇아 이곳으로 모여든다.

그들의 선택이 옳았으면 좋겠다.


  덧붙이자면, 빙콘서트홀은 중국태생의 스탠퍼드대학 수학과 교수이자 기업가 피터 빙의 기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스탠퍼드 대학에는 미국인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부자들이 낸 기부금으로 지어진 건물이 많다. 세계 일류 대학이란 호칭이 지속되는 이유일 것이다.  내 이름을 딴 건물! 상상만 해도 뿌듯하다.


  숙소 근처에 일본인 모녀가 하는 아주 작은 식당이 있다. 음식은 어머니가 만들고 딸이 주문을 받는다. 채식 위주의 덮밥과 카레가 주 메뉴인데 닭 말고 다른 육류는 없다. 테이크아웃만 가능하다. 하루는 식당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투명한 비닐이 쳐진 카운트 뒤에서 마스크를 쓴 딸이 마스크가 없냐며 유창한 영어로 물었다. 없다고 하니 알았다며 주문을 하라고 했다. 나는 닭고기 덮밥과 카레를 주문하며 카드를 꺼냈다. 비닐장갑을 낀 딸은 카운터 밑에 뚫린 공간으로 트레이를 밀었다. 내가 카드를 거기에 놓으니 “땡큐”라고 말하며  트레이를 끌어당긴 뒤 카드를 집어 들었다. 마스크와 비닐장갑을 낀 그녀는 카드를 소독천으로 닦더니 카드기에 갖다 댔다. 계산을 끝내고 카드를 트레이 위에 놓고 다시 밀어 내게 돌려주면서 말했다. 준비하는데 십오 분이 걸리니 그때 찾으러 오든지 식당 밖에 나가서 기다리라. 그때 마스크를 쓴 나이 든 남자가 들어왔다. 딸은 반갑게 그를 맞았다. 자주 오는 손님처럼 보였다. 나는 밖으로 나와 식당 담벼락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가 바로 일어섰다. 쨍쨍한 햇볕이 내려쬐는데 그늘이 없어 앉아있으려니 더웠다. 주위를 배회하다 시간이 다 되어 식당으로 돌아왔다. 음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건네주며 딸이 조언을 했다. “카드 결제할 때 조심해야 될 부분이 있어요. 음식값 밑의 팁 부분을 비워두고 사인만 하면 위험해요. 주인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팁 아래의 합산 부분에 아무 숫자를 쓸 수가 있거든요. 일종의 백지수표 같은 거죠.” 아, 그렇군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시늉을 하며 나는 주문한 음식을 받았다.


  미국은 식당에서는 물론이고 카페에서 커피를 사도 팁을 요구한다. 테이크아웃도 마찬가지다. 서비스의 대가로 주는 것이 팁이지만 이제는 팁이 아예 디폴트처럼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무시하자니 찝찝하고 내자니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식당에서 팁에 관한 센스 있는 문구를 발견했다.  ‘음식값에는 팁이 들어있으니 별도의 팁은 사양합니다. 저희 식당은 20%의 이윤을 남기고 나머지는 직원의 복리후생으로 씁니다. 정기적인 건강검진은 물론이고 치과 관련 보험 및 401K(퇴직연금)도  들어있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나같이 팁에 대한 고민을 하는 사람을 위한 배려 같아 음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미국에 이런 식당이 많이 늘어나면 좋겠다.


  내가 이 일본 식당을 알게 된 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아들이 알려줘서 갔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라 마스크는 그러려니 했다. 비닐 쳐진 카운터도 서로의 안전을 위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조금 별나다고 느낀 것이 카트 위에 카드를 놓고 밀고 당기는 부분과 내 앞에서 카드를 닦는 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몸이 불편한 그녀의 어머니를 보자 상황이 이해됐다. 딸로서는 손님에게 감염될지 모르는 만일의 경우를 걱정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좋았다. 고실고실한 밥맛은 도쿄의 유명한 식당 못지않게 맛있었다. 좋은 쌀에 뜸이 잘 든 밥으로 만든 마끼(김밥)는 여태까지 먹어 본 최고의 맛이었다.  아쉽게도 코로나가 일상에서 사라진 지금도 그 모녀식당은 달라진 게 없었다. 위생에 철저한 건 좋지만 찾아오는 손님을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것이 서비스업을 하는 업주의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팁을 굳이 적지 않은 데는 그러한 내 섭섭함의 표현이 담겨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에 뉴스를 보니 허리케인이 플로리다 주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고 한다. 여름이 끝나가나 보다. 한 달 전에 아들 집에 만개했던 능소화가 지금은 푸른 잎만 가득하다. 주렁주렁 달렸던 호두나무의 호두도 몇 개만 남아 있다. 땅바닥에는 호두껍질 잔 조각이 널브러져 있다. 다람쥐들이 먹어치운 흔적이라고 아들이 알려준다.  밤에 나갔다가 주차를 하려는데 너구리가 빤히 쳐다보며 꿈쩍도 않는다. 헤드라이트로 몇 번 겁을 주니 그제야 달아난다. 아들 삶의 터전이 되어 가는 캘리포니아. 내게는 타향이지만 이번의 여행으로 내 시야가 조금은 더 넓어졌기를 바라면서, 다음 방문을 기대한다.  (2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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