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을 곱씹는 요즘이다. 얼마 전, 옛날 우리 집을 빌려서 살던 분이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집 정리를 하다가 우리 가족의 물건이 나왔다며 물건을 찾으러 오는 김에 차나 한잔 하자는 내용이었다.
2007년, 해외에서 근무하던 남편이 12년 만에 서울로 발령이 났다. 서울의 곳곳을 다니며 살 집을 찾던 중에 하루는 산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다. 낯선 곳이었지만 왠지 편안했다. 동네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이끌려 택시에서 내려 부동산 중개업소를 찾았다. 우리의 희망사항을 듣던 중개업 사장님이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퍼뜩 차 가지고 내려오이소.” 오 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어떤 분이 익숙하게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타시죠.” 얼떨결에 남편과 나는 차에 올라 그분의 집으로 갔다. 인왕산 바위 위에 자리한 하얀 이층 양옥집은 사방이 트여있었다. 멀리는 북한산이, 가까이는 북악산이 보였는데 북악산 아래 모여 앉은 집들이 푸근하게 느껴졌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신기했다. “유럽의 부자는 높은 곳에 산다지요. 여기는 공기가 저 아래보다 2도가 낮아요. 조용한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사철마다 피는 꽃을 보는 재미가 있어요. 서울 시내 이런 곳 없을 겁니다.” 집주인은 집 자랑을 쏟아냈다. 그 가운데, 유럽의 부자는 높은 곳에 산다지요 라는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래, 유럽의 부자처럼 높은 곳에서 한 번 살아보자!' 나이 50에 서울에서 처음 마련한 내 집이었다.
그렇게 홀린 듯 이사해서 외국에서는 해보지 못한 한국적인 살림을 살았다. 뒷마당 양쪽에 장대를 세워 줄을 걸고 빨래를 널었다. 햇볕에 바싹 마른 빨래는 세탁 건조기 안에서 말려진 빨래보다 건강해 보였다. 이불이 일광욕을 한 날이면 내 몸에 비타민 디가 발라진 것처럼 기분이 상쾌했다. 겨울에는 땅을 파서 넣은 김장독에 김장을 보관하였는데 살얼음이 낀 김치를 꺼내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봄에는 메주로 집된장과 집간장을 만들었다. 서울의 한복판에서 Slow Life를 하며 살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산에 올랐다. 여태껏 살면서 무심코 맞이했던 계절의 변화를 처음으로 음미했다. 봄에 피는 꽃이 지면 여름 꽃이 피어났다. 가을에는 나뭇잎이 존재를 드러냈고 겨울이면 꽃과 나무들은 자기 순서가 오기를 저마다 조용히 기다렸다. 산을 다니며 나무들의 여유와 순응을 배웠다.
외출하고 집으로 올라오는 가파른 골목길에서는 몇 번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어느 정도 숨 가쁘게 올라오면 다른 공기를 코로 느끼고 피부로 느꼈다. 가끔씩은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울컥하기도 했다. 눈 예보가 있으면 아이젠(톱니 달린 덧신)을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서 돌아오는 귀갓길을 위한 준비를 했다. 어쩌다 택시를 타면 내비에도 안 잡히는 길을 안내하며 택시기사의 눈치를 살폈다.
가파른 골목 오르내리기, 눈 치우기, 이웃과 정 쌓기, 개와 같이 산 타기, 택시기사 다루기 등에 적응 할 무렵 남편이 싱가포르로 발령이 났다. 부암동 집에 산 지 3년이 흐른 뒤였다. 이런 외진 곳에 살려는 사람이 있을까 의아해하며 집을 내놓았다. 집이야말로 운때가 맞아야 한다고 했던가. 어느 날 부부가 집을 보러 왔다. 아이 학교가 집에서 멀지 않고 동네가 조용하다며 마음에 들어 했다. 나도 이들에게 집을 맡긴다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아파트에서 살다 온 이 가족에게 정원 관리에 필요한 도구 등을 물려주고 추억 어린 집을 떠났다.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가 된 우리는 가끔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집의 수도관이 터졌다거나 긴 장마로 방에서 곰팡이가 폈다거나 재산세 고지서가 날아왔다거나 하는 내용을 알리고 처리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하지만 세입자는 대문 위의 장미가 소담하게 피었다든지, 집에서 가을의 정취를 누리고 있다든지, 집 앞 공터에 새 집이 들어선다는 등, 집이나 동네 소식으로 말문을 열었다. 장미가 활짝 핀 사진이나 집 앞의 풍경을 찍어 보내기도 했다. 나는 새로 이사 간 싱가포르의 생활과 날씨를 언급하며 그녀가 전해주는 이야기에 화답했다. 글의 말미에는 집에 관한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메일은 내가 인도로 옮겨가서도 이어졌다. 아들의 예비군 훈련 통지서가 날아왔다며 통지서 사본을 보낸 그녀의 메일에 나는 뉴델리에서 집을 찾다 포기하고 호텔에서 지내기로 했다고 전했다. 방독면을 써야 할 정도로 델리의 공기가 나쁘다거나, 몬순 기간에 내린 비로 도로가 침수됐다는 등의 인도 소식을 알리면 그녀는 후배가 집에 놀러 왔다가 동네를 너무 좋아해 이사까지 하게 되었다며 후배의 이사한 집 위치를 소상하게 알려주었다. 생각해 보니 우리 집 개가 그 집의 아들 다리를 물어 그 부모에게 머리 숙여 사죄한 집이었다. 남편과 내가 한국에 잠시 나올 때면 우리 집, 아니 세입자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6년 동안 우리 집에서 살던 세입자는 우리 집 가까이에 새 집을 지어 이사했다고 소식을 전했다. 언제 한국으로 돌아갈지 알 수 없었던 우리도 집을 처분했다. 이메일은 그즈음 끊어졌다.
그러다 뜻밖에 반가운 문자를 받은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세입자가 알려준 집 주소를 찾아갔다. 부암동 우리 집과 번지 수만 다른 그 집으로 가는 골목길은 옛날과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세입자의 집은 정갈하고 소박했으며 부부를 닮아 있었다. 최소한의 가구로 꾸며진 실내에서는 자연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내미는 상자는 생각보다 컸다. 내용물이 뭔지 궁금했으나 그 자리에서 확인하기도 뭐해서 그냥 집으로 들고 왔다. 우리가 이삿짐을 쌀 때 다락방 구석에서 미처 꺼내지 못한 물건인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 상자를 열어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추억거리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남편이 새로운 나라로 이동할 때 회사 동료들이 돌아가며 적은 카드와 송별식 사진, 아들이 미국 고등학교 시절 받은 상장들, 그리고 내 이름으로 온 몇 년 간의 연금 납부 통지서와 예술의 전당에서 발행한 잡지 등이 들어 있었다. 잊고 지냈던 우리 가족의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소중히 간직해 준 따뜻한 손길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 집을 자기 집처럼 보살펴주는 것도 모자라 우리 가족의 뒤치다꺼리를 해 준 이들과의 인연을 살펴보니 17년이었다.
며칠 전 세입자 부부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방문했다. 유럽 부자처럼 높은 곳에 살기에는 돈도 체력도 부족하여 생활하기 편한 평지에 위치한 아파트다. 비록 우리가 한 시절 공유했던 집이 세입자의 집도 우리 집도 아닌 ‘다른 사람의 집’이 되었고 세입자도 우리도 각자 다른 집에 살고 있지만 ‘부암동 그 집’으로 소중한 인연이 맺어졌다. 이 인연이 오래 지속되면 좋겠다.
(2024.3.)
#부암동#싱가포르#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