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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

by 이효명 Feb 05. 2025

색종이로 학을 접고 마지막에 날개를 펼치면, 마치 학이 생명을 얻은 듯하다. 어디론가 날아가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것처럼.

얼마 전부터 우리 집 부엌에는 한 마리 학이 누워 있다. 그것도 물에 젖은 채로, 축 늘어진 채 싱크대 옆에. 싱그러운 초록색 줄무늬를 자랑한다. 요리 보고 조리 봐도 학처럼 생겼다. 음력설도 지나고 새해가 밝았지만, 언제부터 그곳에 같은 자세 그대로 있었는지 모르겠다.

수필 수업에 ‘사물을 깊게 관찰하라’는 과제를 받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했다. 성실히 과제를 하려고 하는 찰나, 그 물건이 내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엄마를 돕겠다고 설거지를 하던 어린 시절, 싱크대에는 늘 물기가 가득했다. 어릴 때는 엄마가 기특하다며 칭찬해 줬지만, 나이가 들수록 마무리를 못 한다며 타박을 줬다. 설거지가 끝나고 나면 주변까지 깨끗해야 한다며 엄마는 행주를 꺼내 싱크대 주변 물기를 닦았다. 마무리로 그것을 탈탈 털어 싱크대에 반듯하게 걸쳐두는 것으로 설거지를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엄마의 행주에서는 항상 소독된 듯, 수영장 냄새 같은 좋은 향기가 났다. 오래 쓰느라 구멍이 나고 해져 있는 것도 언제나 깨끗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어느 날, 거실까지 퍼지는 꿉꿉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 원인을 찾아보니, 바로 행주였다. 엄마가 하던 대로 탈탈 털어 말려도, 퐁퐁으로 빨아도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장마철 덜 마른빨래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처럼, 조그만 천 쪼가리 하나에서 나는 냄새가 온 집안을 진동했다.

그 뒤로 우리 집에서 행주는 쉽게 버려졌다. 전단지에서 받은 것, 마트에서 산 일회용도 예외 없이 냄새가 나면 그 순간 바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나는 엄마처럼 살림을 깔끔하게 챙기지 못하는 딸인가 보다. 행주 대신 물티슈와 키친타월, 그리고 두루마리 휴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집 싱크대에서 물에 젖은 채로 누워 있는 이 행주는 남편의 손에 이끌려 우리 집에 왔다. 남편도 어머니의 기억이 남아 있는 걸까. 가끔 설거지를 대신해 줄 때마다 마지막에는 꼭 행주를 찾았다. 우리 집에는 그 녀석이 없다고 몇 번을 말해도 듣지 않았다.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이소에 다녀오겠다던 남편의 손에는 행주 한 팩이 들려 있었다. 50장이 겹겹이 쌓인 초록색 줄무늬의 일회용 행주. 몇 장을 써왔는지 모른다. 이제 물에 젖어 축 늘어진 학 한 마리가 싱크대 옆에 누워 있다. 새 행주는 가스레인지 위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엄마의 행주는 오랫동안 부엌을 지켰지만 내 행주는 쉽게 사라진다.
엄마의 행주는 늘 좋은 냄새가 났지만 내 손에 닿은 행주는 그 향을 지키지 못한다.  엄마의 행주는 누더기가 되어도 쓸모가 있었지만
내 행주는 겉은 멀쩡해도 쓸모가 없다.
엄마의 행주 속에는 물건을 아껴 쓰는 정성이 배어있었다.
그 정성을 나는 배울 수 있을까?

너무 쉽게 버리고 새로 사는 세상에서 오늘도 새 행주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내 인생은 어떤 인생일까? 퀴퀴한 냄새가 나 몇 번 쓰지 않고 버려지는 것일까? 아무리 써도 깨끗하게 좋은 냄새가 나는 언제나 새것 같은 인생을 만들어갈 것인가? 어떤 인생을 살아가는 게 바람직할지 정답은 정해져 있지만 마음만큼 되지 않는 현실에 행주를 쳐다보며 한숨짓는다.

오늘도 여전히 쓰기를 망설이며 층층이 상자 속에 쌓여있는 행주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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