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어왔던 나의 마음일지도 몰라요
"저 사람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이런 행동을 한 것이 분명해요!"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길 수도 있죠. 직접적으로 의도를 표현한 게 아닌 이상, 그 정도는 아닐 가능성이 더 높아요."
"분명히 저를 의식해서 ~한 것일 걸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별생각 없이 살다가, 서로 마주쳤을 때 일시적으로 불편해서 한 행동일지도요."
"어휴...."
이런저런 말씨름을 하다 보니, 절로 기운이 빠졌다.
"지금 왜 이렇게 상대방의 반응 하나하나에 스트레스받고, 힘들어하는지 아시겠어요? 모든 사람과 잘 지내야 한다는 기준이 있는 거예요. 이것도 하나의 비합리적 신념일 수 있어요."
"너무 오랫동안 감정을 회피해오다 보니, 그 연습이 오랫동안 잘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그걸 납득시키기 위한 생각의 논리 회로가 오랜 시간 동안 발달한 것으로 보여요.
사실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다양한 비합리적 신념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오늘 대체 비합리적 신념이라는 말을 몇 번 들은 건지.
속이 답답했다. 그럼 대체 합리적 신념은 무엇일까? 이렇게 험한 세상에서, 강한 주관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흔들리거나 물들지 않고 사는 게 아니란 말인가? 그냥 다 그럴 수 있지~ 하며 속 편하게 사는 것이 합리적인 신념인 걸까?
기분이 이상하게 억울했다. 그동안 바르게 살아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비합리적 신념이란 말을 듣는 순간 나에게 ‘틀린 부분’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기까지 아주 긴 대화를 했지만, 함정이 하나 있다. 그마저도 나는 전혀 몰랐고, 상담사님이 발견한 것이다.
그건 바로, 내가 지금까지 얘기하는 동안 ‘한 번도 감정에 대한 얘기를 꺼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상황과 그에 대한 내 생각, 판단 위주였다. 그래서 감정을 꺼내 보라고 하시기에, 간신히 쥐어짜서 말해보면, ‘그건 판단에 의한 감정이에요.’, ‘그건 생각과 의도가 들어간 거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 대체 감정이란 뭐란 말인가. 너무 어려웠다.
대체 왜 상담만 오면, “기분이 어때요?”, “어떤 감정이 들어요?”라는 이 두 질문이 제일 말문이 막히는지 모르겠다. 그냥 괜찮은 기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분인데. 뛸 듯이 기쁘거나, 무지막지하게 화나야 하는 걸까?
나는 항상 기분이 비슷한데.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나는 점점 더 멍해졌다. 불편했고, 상담사님이 뭔가 원하는 답이 있는 것 같은데 정답을 끌어낼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그렇지만, 맨 처음 상담의 목적을 말하던 때를 떠올렸다. 고쳐달라고 한 건 나였으므로, 무언가를 치료하는 과정이 편할 순 없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상담사님은 내가 즐거워 보이지 않고,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상했다. 나는 지금 불행감을 느끼지 않고 평온한 상태인데.
단지 쉴 때 부정적 생각이 들어 좀 불편한 걸 고치고 싶을 뿐인데.
대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행복하길래..? 다들 방방 뛰고 다니는 걸까? 나는 내가 단지 차분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텐션이 높진 않지만 충분히 놀러 다니고, 할 일을 하며 제 기능을 하는 걸.
답답한 와중에, 상담사님이 마지막으로 본인 말을 따라 해 보라고 했다.
“저는 지금 너무 행복해요.”
그대로 따라 해 봤다. 어떤 것 같냐고 물으시기에, “아닌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이번엔 이 말을 하라고 했다.
“저 지금 너무 힘들어요.”
어..? 그런데 이상했다.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떨어졌다.
원래 같으면, 울려는 징조가 보일 때 미리 눈치채고 참으려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그렇지만, 그러기엔 너무 갑작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아잇 씨..” 하고 황급히 진정을 하려고 했다.
그다음엔, “저 지금 너무 외로워요.”라고 말해보라 했다.
그 말은 왜인지 거부감이 들었다. 내가 무언가 감정적으로 힘드니 외로울 수도 있는 걸까 생각하면서도, 아직은 나의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받아들이기 싫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건 아직 모르겠어요.” 하고 멋쩍게 웃었다.
그러다가, 다음 말을 따라 해 보라고 했다.
“저 너무 힘들어요. 너무 우울하고, 화나서 힘들었어요. 그래서 감정을 안 느끼려고 참았어요.”
따라 해 봤다. 울지 않으려고 참으면서 말하다 보니, 내 입을 통해 뱉은 말들이 목소리를 통해 귀를 통과했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이었다.
왜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이었냐면, 내 깊은 곳에 있던 본심이니까.
정답이었다.
감정을 추스르는 데는 1-2분 걸렸던 것 같다. 이번에도, 울컥하는 순간 황급히 진정하려고 애썼다.
마지막에 상담사님이, “오늘도 본인이 2시간 넘게 열심히 디펜스 하고 있던 거 알고 있죠?”라고 물어보셨다. 나도 한껏 피곤한 얼굴로 답했다. “네. 알고 있죠..”
그렇게 진이 빠져서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한 지 몇 분 안 되어 직장에 불려 가서 일을 하고 왔다. 일하는 내내 어딘가 얼이 빠진 사람처럼 집중이 잘 안 됐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고, 지끈거렸다.
상담하는 내내, 본심을 숨기기 위해 말을 돌려가며 그만한 감정 노동을 했던 것이다.
원래 집에 오자마자 상담 내용을 정리해 두려고 했지만, 그럴 기력이 없어 불편하고 피로한 마음으로 지쳐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