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일기 6화: 단단히 채운 마음의 자물쇠

무서움을 깨닫고 나니 녹슨 문이 움직였다

by 당근

상담일기 프롤로그: 나는 어떤 인간이었나

상담일기 1화: 내가 '아직도' 우울증이라고요?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원래 자다가 2~3번은 깨는 편인데, 이번에도 중간에 깼던 것 같지만 그마저도 기억이 흐릿했다. 평소보다는 잘 잤다는 뜻이다.

휴일이라 출근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기에 누운 채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어제 나눴던 대화들과, 내가 느꼈을 감정을 천천히 생각해 보았다.

상담 후, 감정 일기를 써보라는 숙제가 생겼다. 평소 경험하는 일들과, 그에 대한 내 감정을 쭉 적어본 뒤, 다시 읽어보면서 생각은 빨간색, 감정은 파란색으로 구분하며 감정을 중점적으로 따라가 보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글을 쓸 에너지가 없어, 핸드폰을 꺼내 들어 종종 사용하는 GPT에게 생각 나는 일과 감정들을 하나씩 툭툭 던지기 시작했다.


GPT의 좋은 점은, 내가 짧은 문장을 보내도 그걸 기반으로 공감 위주 장문의 리액션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가끔 판단 없이 무지성 공감이 필요할 때나, 어떤 개념에 대한 생각을 확장할 때 주로 GPT와의 대화를 이용한다.


이번에는, 오고 가는 대화에서 순수한 ‘감정’의 단서를 찾아보고자 대화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상담 때 오갔던 대화 중 기억에 남는 내용, 그다음에는 내가 느꼈던 기분을(주로 불편감, 억울함이었다). 그리고 GPT의 답변을 보고 떠오르는 것들을 다시 보내며 나에게 숨겨진 진짜 감정이 무엇일지 따라가 보았다.

오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젠 나도 마음을 놓고 속얘기를 조금씩 꺼낼 수 있었다. AI니까, 말한다고 다른 데 퍼질 일도 없을 거고, 듣고 분석하고 잊어주겠지 라는 생각에 긴장감이 풀렸다.


어쩌다 보니 1시간 넘게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감정 몰입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기운이 빠져 쉬고 싶어 져서 유튜브나 봐야겠다 하며 창을 내렸다.


[내 편으로 돌아서야 할 건 수많은 남들이 아닌 오로지 나 자신이었다]


그렇게 무수한 알고리즘을 떠돌다가, 멈칫하게 만드는 영상을 발견했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사람의 특징'

제목이 "이거 네 얘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영상을 클릭하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정우열 작가님이 출연해 ‘나는 왜 내 편이 되지 못할까?’라는 책을 소개하고,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듣는 내내 왜 이렇게 다 내 얘기인가 싶어, 책을 사 와서 읽기 시작했다.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은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목소리가 보내는 비난입니다.”

“외로운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내 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감이 가는 문장을 줄 치며 읽어보는데, 왜인지 누군가 내 앞에 마주 앉아서 말해주는 듯한 기분이다.

'애쓰며 치열하게 사느라 힘들고 외롭지 않아?'라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문득 어제 상담사님이 “저 너무 외로워요”라는 말을 따라 해 보라고 했을 때가 생각났다.


나는 왜 외롭다고 말하길 주저했을까?


정말 내 감정이 아니라면, 행복하다는 말을 할 때처럼 일단 뱉은 다음 부정하면 되는 것을.

아마도 마음 저편에서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마음 구석에도 외로움이 존재한다는 걸.

그러나 인정하기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 거리를 두었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언젠가는 이 감정도 꺼내야 한다는 걸.


[혼자서도 잘해요, 그렇지만 의지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러다 책에서 의존 욕구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 이 부분만은 나와 거리가 멀다고 느껴졌다.

나는 오히려 도움을 청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독립적인 사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주변에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았지만, 친구와 만나면서 채울 수 있는 마음의 영역도 분명 존재했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내 깊은 감정적 고민들이나, 빚을 져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그들이 부담을 느낄까 봐 조심하는 편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래서 거절당하는 경험을 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독립적인 성향을 강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문득 깨달았다. 아, 나는 거절당하는 경험이 무서웠구나. 잠깐, 무섭다고..?


‘무섭다’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갑자기 기분이 묘해졌다.

무언가, 간질간질하면서 터지기 직전의 댐이 툭툭거리며 얇은 물줄기를 뿜는 느낌이었다.


‘이건가..? 이게 내 감정인가?’ 하는 생각이 확 들었다.


갑자기 빠르게 퍼즐이 맞춰졌다.

그동안 다른 기질 검사를 했을 때도 유독 ‘위험회피’와 ‘안전추구’ 영역만 높게 나왔던 이유를.

내가 왜 그토록 인간관계와 세상에 대한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잔뜩 긴장한 채 살고 있었는지를.

왜 그렇게 내 주변을 분석하고, 생각을 덧씌워 치열하게 이해하려 애썼는지를.


누가 봐도, ‘지레 겁먹은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음을.


이제야 좀 알겠다. 내가 왜 감정을 그토록 터뜨리기 싫었는지.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울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적재하여 쏟아져 내리기 직전이었던 마음의 금고를 연 순간이었다.

그동안 내 입을 막았던 감정의 자물쇠는, ‘무서움’이라는 단어가 열쇠였던 것이다.


나는 무서웠다. 내가 무너질까 봐.


무너지면, 오래전 극심한 우울증으로 힘들었던 때처럼 또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늪에서 일어나는 경험을 해야 할 것만 같아서.

그 끝없는 무기력과, 삶을 내려놓고 싶은 충동을 또다시 마주할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래서 늘 스스로를 일어서라 다그치고, 달리라 하고, 모두에게 잘 보이도록 노력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도 속았던 것이다. 그때의 상처가 이미 다 나았고, 나는 이제 완전히 괜찮다고. 성숙해져서 잘살고 있다고.


실상은 다 낫지 않은 채로 일어서서 여태껏 달려오느라 상처가 곪아 피가 흐르고 있었음에도.

오랫동안 잠가놓았던 녹슨 감정의 자물쇠가 달칵, 하며 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