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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봉기 Mar 04. 2024

삶이란 드라마의 악역 孤獨의 정체는?

孤獨이란 단어는 예순이 된 나에게도 부담스럽기만 하다. 20대 때 미국에서 대학원과정을 보낼 때 늘 혼자 지내던 시간은 고달프기만 했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현재 아들과 딸을 하나씩 슬하에 둔 내가 새삼스레 孤獨을 거론할만한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삶에서 고독은 무겁지만 나름 소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고아나 사생아가 아니라면 가족들과 함께 생활한다. 또한 걸음마를 하며 또래들과 어울리고 학교에 가도 친구들이 많다. 따라서 인간은 겉으로 보면 결코 고독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성장해 가면서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취향과 생각 때문에 아무 하고나 터놓는 사이가 되기는 어려울 뿐 아니라 설령 누군가가 곁에 있을 때까지 마음은 마치 먼 곳에 떨어져 있기도 한다.


어두운 감옥의 독방처럼 차갑고 무겁기만 한 孤獨과 친해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라도 한가할 때에는 편한 상대와 식사 혹은 차를 함께 하며 가벼운 얘기라도 나누길 원하지 혼자서 고독한 시간을 가지는 걸 선호하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고독이란 건 외형적으로는 재미없고 메말라 보이지만 표피를 벗기면 인간을 성숙 발전시키는 엄하고 모질지만 사랑으로 가득 찬 스승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孤獨은 인간과 운명적인 관계에 있다. 인생이란 行路에는 가족과 친구 그리고 선배와 후배 등 삶의 다양한 동반자들이 존재하지만 이들이 자신과 늘 또한 끝까지 함께 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삶의 온전한 동반자는 자신일 수밖에 없다. 학창 시절 때에도 시험공부를 한다고 친구집에 가거나 여럿이 함께 공부를 하며 난리를 쳐도 자기의 공부를 남이 대신해줄 수는 없다. 또한 암만 사랑하는 경우라도 대신 아파주거나 또는 대신 죽어줄 수는 없다. 결국 인간은 운명적으로 자기 자신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고독한 존재이다.


또한 인간은 '客觀的'이란 말을 쓰지만 냉정하게 보면 자신이 아닌 남의 입장이 되기는 어렵다. 말로는 쉽게 남의 입장에서 생각한다고 하지만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자기' 대신 '남'이란 말만 붙인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인간은 혼자 왔다 혼자 가는 존재이고 또한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귀로 듣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또한 주관이란 틀을 벗어나기 어려운 孤獨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인간과 인생 외에도 고독한 게 또 있다. 4.19가 끝난 1960년 6월 30일에 나온 시 '푸른 하늘을'에서 김수영시인은 많은 이들이 자유를 외치다 희생된 일이 있은 후에 "자유에는 피냄새가 섞여 있는가를"이라고 했고 또한 "革命은 왜 孤獨해야 하는 것인가를"이라고 담담하고도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그 시는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로 시작된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도 마냥 행복해만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孤獨이란 흔적이 깊게 자리한다. 남녀가 만나서 사랑이 싹트고 무르익을 땐 서로 보고 싶어 아우성이지만 그 감정은 영속적이지 않기에 감정이 식을 때엔 마치 魔藥의 환각에서 깨어나듯 냉랭하고 고독해질 수 있다.


이렇듯 고독은 삶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때로는 인간을 괴롭히거나 농락하지만 때로는 인간에게 철갑과도 같은 옷을 입혀 주기도 한다. 인생이란 드라마에 孤獨이란 惡役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멀리서 애를 써서 찾아오는 관객이 아무도 없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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