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흐르는 게 세월이다. 인간이 암만 발버둥을 쳐도 흐르는 세월은 잡을 수가 없는데 이는 흐르는 물을 막을 수 없는 것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군에 입대해서 귀가 따갑게 들었던 말이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세워놔도 간다"였다. 이렇듯 무심코 지나가는 듯 보이는 게 세월이지만 세월은 나름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세월은 세상을 다양하게 바꿔놓는다. 밀알이 땅에서 썩어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도 세월이지만 폭풍우를 몰고와 한 인간을 흔적도 없이 삼켜버리는 것 또한 세월일지 모른다.
나는 올해 환갑이 되었고 나의 부친은 93세, 모친은 88세이다. 몇 년 전 부친이 위독할 때가 있었다. 부친은 젊은 시절 신장염을 앓았는데 그 후 별 탈이 없어 회복된 걸로 생각했지만 고령으로 신장기능이 저하되며 갑작스럽게도 혈압이 크게 올랐다. 약사이신 부친은 자신의 건강관리도 의사보다 당신의 경험이나 판단에 의존해 왔기에 살면서 병원문에 노크를 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혈압이 무섭게 오르는 걸 본 동생은 큰일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고집만 부리던 부친을 등에 업고 급히 가까운 병원으로 달려갔다. 지금 판단컨대 만일 그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부친과 이별을 할 일도 생겼을지 모른다. 현재 신장의 기능이 5%밖에 남지 않은 상태로 주 3회씩 투석에 의존하는 부친이지만 아직 연세에 비해서는 건강하다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주변 지인들의 부모님 중 최고령자가 95세이신 친구 모친이신데 현재 24시간 요양보호사가 곁에 붙어 지낸다. 과거 병원에서는 하혈을 하며 신음하시던 부친이 곧 눈을 감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당시 나는 마치 하느님과도 같았던 부친과의 이별을 떠올리며 혼자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이제는 부모님과 나와의 관계만큼 소중한 나랑 자식들과의 관계를 떠올려본다. 어릴 땐 애들이 하는 일들이 왠지 못마땅하게만 보여 잔소리를 쏟아냈건만 이들도 성인이 되니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고 있다. 요즈음엔 내가 왜 그리도 잔소리를 했던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나도 애들 나이 때는 별반 다를 바 없었을 것 같은데 이 또한 흐르는 세월의 조탁이 아닐까 싶다.
인간에게도 세월의 흔적은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고스란히 남아있다. 인간은 10대나 20대 때는 순수함과 패기로 살지만 30대나 40대 때는 연륜이 쌓여 자기만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또한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모난 데가 하나씩 없어지며 속으로는 차돌처럼 단단해지는 존재이다. 2010년에 발간된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처럼 20대는 기성세대들과 부딪히며 상처를 받거나 아니면 삶에 대한 이해부족 속에서 고뇌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만일 20대 때 시련조차 없이 평온하기만 하다면 훗날 감당키 어려운 일이 생겨 삶이 풍비박산날 때 강하게 맞서기보다 삶 자체를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공자는 나이 마흔을 불혹이라고 했는데 지금이라면 환갑 정도는 되어야 그 말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자기주장을 하기 좋아하고 일이 잘 될 때엔 자신만만해지지만 한번 일이 어긋나기 시작하면 급속히 추락하기도 한다. 한때 세상에서 부러울 것 하나 없던 한 유능한 이가 있었다. 그는 80년대 초 사법고시에 수석 합격하여 판사로 임용된 후 유명법무법인을 거쳐 중견기업에서 경영자로 일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란 말이 아깝지 않던 그에게 예기치 않은 폭풍이 몰아친다. 앞만 보고 달리던 그가 어느 날 주가조작혐의로 검찰조사를 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차에 연탄을 피워놓은 채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세월은 강산도 바꿔놓고 아이들도 어른으로 만들지만 때로는 한 인간을 파멸로 이끌기도 하는 것이다.
세월이 흐른 후 과연 자신이 어떤 모습일지를 예측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한마디로 세월은 블랙박스와도 같다. 세월이란 블랙박스를 통과한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떠할까? 환갑이 된 지금 그럴 리도 없겠지만 큰 부자나 권력자로 남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최소한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노력한 인간으로 남고는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