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분야 외의 지식에는 관심 자체가 없는 이들이 있는 반면 지적 호기심이 강하여 박학다식한 이들도 있다. 아는 게 많다고 돈이나 명예가 따라붙는 건 아니지만 지식욕이란 건 인간이 가지는 하나의 기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교시절 이과반과 달리 문과반은 독서에 대한 관심이 크며
독서 토론을 벌이는 일이 있었다.
예로부터 하루종일 방에 앉아 책을 넘기거나 먹을 갈아 붓으로 시를 쓰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글이나 책이라고는 모르고 일만 하며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활이 안정되어야 공부도 하는 것이지만 과거에는 먹을 양식이 있건 없건 밖에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오로지 책만 보던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을 선비라 불렀다. 선비들은 사서삼경을 비롯해 명심보감과 같은 한문 고전들을 줄줄 외우며 지냈는데 어찌 보면 현재 교회의 목사들이 요한복음, 사도행전 몇 장 몇 절을 줄줄 외우는 것과도 유사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당장 입에 풀칠도 못하더라도 곧 잘 공자님 얘기를 하던 분들은 저 세상으로 갔지만 현재에도 성서에 삶을 걸다시피 하는 이들은 꽤 있다. 반면 성직자들은 신도들이 자신들의 말에 순종하기를 원하지 도전적인 질문을 하거나 자신들이 잘 알지 못하는 걸 물어보면 나무라기까지 하며 "신앙은 머리로 알려해서 되는 게 아니라 믿는 것이다"라고 훈계도 한다.
1979년에 나온 이문열의 소설 '사람의 아들'은 성서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가르침에 정면으로 도전한 작품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 성서해석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해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던 범상치만은 않던 소설이었다. 그중 하나가 性에 대한 태도이다. 현재 교회에서 금기시하는 것 중 대표적인 게 바로 간음이다. 천주교는 성직자들을 독신으로 살게 하며 일반인들의 성적인 자유를 원천봉쇄한다. 심지어 성적인 상상까지 죄악시한다. 하지만 '사람의 아들'에서는 그런 식으로 금지된 성적인 문제를 자유롭게 스케치하며 세상의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한 접근도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듯 악이 있기에 선의 정체가 분명해진다는 식의 상대적인 논리를 보여준다.
교회에서는 인간은 아담과 이브가 사탄의 꾐에 빠져 선악과를 먹고 나서 죄인이 되었는데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어 죄인인 인간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죽게 함으로써 그간 단절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었기에 인간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주일날 교회에 나가 주께 감사와 찬미를 바치며 또한 헌금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나는 한때 천주교 신자로서 이러한 성서 관련한 내용을 좀 더 체계적이고도 정확하게 알고 싶어 한 성직자에게 다가가 "성서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은가요? 또한 성서는 신의 계시를 받아 쓴 글이라고 하지만 과연 완벽한 것인가요?"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자 "성서는 성서공부반에 가서 배우면 된다"라고 하며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당시 왜 그럴까 생각하며 당혹스러워하기도 했는데 차츰 교회란 곳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교회는 성서의 말씀을 실천하는 곳이라기보다 심하게 말하면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모 마리아를 간판에 걸고 주일마다 관객을 모아 공연을 하는 곳이란 사실이다.
'사람의 아들'에서는 성서에서 말하는 형식적인 교회가 아닌 현실에서 실천하는 교회의 모습을 그려낸다. 고아나 껌팔이 혹은 파출부와 같은 사회 소외계층으로 구성된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일하며 생활하는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신학대학을 박차고 나와 실천적인 공동체의 삶을 추구했던 주인공 '민요섭'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생각을 접고 본래의 신앙의 길로 돌아가려 하자 그의 동지 '조동팔'은 그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성서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외에도 일반인들이 별 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고착화된 기존질서에 도전하는 시도는 필요하리라 보인다. 나는 대학에 갇 입학했을 때 당시 하숙집 옆방에서 지내던 한 분의 직장인과 철학교수로 재직하다 7년 전 정년퇴직한 철학강사께 "서울만 대도시인가요? 부산도 같은 대도시 아닌가요?"라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당시 직장인이던 분 말씀이 "서울과 부산은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아"라고 면박을 준 반면 철학강사분은 그 말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그 후 둘이 있을 때 "철학은 기존 질서에 언제라도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