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우 Jun 11. 2023

더울 때 시원한 곳에서 일하고

참 괜찮은 직장이었지


바깥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는 탓에 길을 걷는 사람들의 표정은 지쳐 보인다. 하지만 내가 하루종일 근무하는 곳은 쾌적하다 못해 서늘함마저 느껴지는 곳이다. 바깥 기온이 높아질수록 실내 기온은 점차 낮아지며 온도차를 더욱 크게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나갈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시계도 설치되어 있지 않고 창문도 없으니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고 쇼핑과 수다를 겸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머물게 된다. 이곳은 바로 백화점이다.


내가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된 것은 2004년 여름쯤이었다. 우연하게 봉사활동을 통해 알게 된 친구가 근무하는 곳이었는데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근무를 할 수 있으며, 근무경력을 모두 인정해 주어 본인처럼 매니저가 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일을 해야만 하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내 조건에 이만한 곳은 찾기 쉽지 않을 거라는 친구의 권유로 시작하게 되었다. 여성의류 매장에서의 근무는 낯설고 어리숙한 모습이었지만 마음만은 반드시 친구처럼 매장을 운영하는 매니저가 되겠다는 목표로 군기가 바짝 든 초보가장의 모습이었다. 잔뜩 긴장한 마음에 시원한 곳에서의 근무가 바깥의 무더운 날씨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니 신세계가 따로 없겠다라며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더랬다.




잠시 들러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다녔을 때에 보았던 직원들은 매장에서 우아하게 서 있기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직접 근무를 해보니 눈에 보이는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매장을 연출하고 우아하게 고객을 응대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직원들의 수고로움의 결과였다는 것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어떤 일이든지 보이는 것 그 이면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임을 다시 한번 느끼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여성의류 매장의 근무시간은 영업이 시작하기 한 시간 전부터인데 약하게나마 에어컨이 켜져 있었다. 그래서 낮시간의 온도보다는 높았지만 그래도 근무하는 데는 별 상관이 없었다. 문제는 영업시간이 끝나고 특별 행사라도 진행될 때였다. 행사진행을 위해 행사제품을 챙겨 행사장에 가져다 놓고 퇴근을 해야 하기에 곧바로 퇴근할 수 없었는데 이때 에어컨이 켜지지 않았다. 영업시간에야 온몸이 서늘할 정도의 온도로 에어컨이 돌아가지만 끝나고 나서는 야박하게도 바로 모두 정지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는 바로 최악의 근무지가 되고야 마는 것이다. 창문도 없이 바람이 통하지 않고 에어컨이 꺼진 곳에서의 고군분투는 온몸이 서늘했던 영업시간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땀에 푹 젖어버리기 일쑤였다. 이렇게 가끔 진행되는 행사만 아니라면 영업 종료와 거의 동시에 집으로 향하는데 바깥 날씨가 무척 더운 날엔 하루종일 얼어있던 몸이 스르르 녹으며 오히려 따뜻해서 좋다는 우스갯소리들을 하며 퇴근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곤 했었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너무나 따뜻하게 근무하며 나의 30대 중반부터 40대 모두를 보냈던 그곳을 완전히 정리한 게 작년의 일이었다. 나에게 꿈도 희망도 좌절마저도 남겨준 그곳을 떠나 지금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요 몇 년째 여름은 예전보다 무덥고 습도가 너무 높아져서 에어컨이 켜진 건물에 들어서면 시원함과 쾌적함을 느끼게 된다. 그럴 때면 16년 이상을 뜨거운 날씨 걱정 없이 근무했던 그곳에서의 시간들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초여름으로 들어가는 시기인 요즘 문득 여름을 떠올려보니 크게 특색이 있거나 기억할 만한 이야깃거리가 별로 떠오르지 않았다. 사유하는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싶어 조금 아쉽기도 하다. 올여름은 예전보다 더 예민하게 느끼고 깊이 사유하며 여름을 주제로 글 쓰는 시간을 더 가져 봐야겠다 마음먹어본다.

작가의 이전글 흐르는 강물처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