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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 Aug 13. 2023

준비되지 않은 어설픈 엄마

아직도 난 어설픈 엄마다


배를 만져보다 덜컥 겁이 났다. 몸의 변화가 며칠째 이어지면서 혹시나 걱정이 되었다. 제대로 예측하기 쉽지 않았다. 워낙 불규칙한 생리일정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이틀정도만 생리를 했다. 늘 예민한 몸과 마음으로 한 달에 두 번을 하기도 하고 한 달 정도 거르는 일도 잦았기에 또 그러는가 보다 했다. 그렇게 시간은 훌쩍 2~3개월이 지나갔다.


그와는 나이차이가 많이 났다. 사무실에서는 웬만한 한자는 모두 그에게 물어보라고 할 정도로 브레인으로 정평이 나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다 알고 보니 야간대학 전자공학과를 다니고 있었다. 말투는 조금 투박했지만 내게 친절했고, 내가 하는 임시직 업무가 한자를 한글로 옮겨 컴퓨터에 새 프로그램 등록을 하는 업무였기에 그에게 묻는 일은 무척 잦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끔 그의 업무도 도와주며 가까워졌고, 일을 도와줬다는 핑계로 저녁을 사겠다는 그와의 시간은 업무 외의 시간으로 늘어만 갔다.


늘 공부에 미련이 남아있던 나는 그에게 끌렸다. 어려운 한자를 많이 알고 있으며 한자를 쓰는 그의 필체도 너무 보기 좋았고, 공학도 이기도 했으니 더욱더 이끌렸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는 외모도 선뜻 저녁 약속에 나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게 서서히 가까워지다 보니 내 이야기를 조금씩 하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나를 안쓰럽게 여겨주었고, 늘 힘들겠다며 위로를 해주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어보려 애썼고, 급기야는 퇴근 후 맥줏집 서빙 아르바이트를 구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는 매일 일한 시간을 계산해 엄마에게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이라며 그가 비용을 주었고 그 돈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엄마는 내가 돈을 벌어다 가져다준다는 것에 만족했고, 가끔은 일한 시간을 체크해 놓고 금액이 맞고 틀린 지 계산해서 이상하다고 확인해 보라는 날도 생기곤 했다. 지독하게도 몇 천 원까지 따지며 돈을 빼돌렸는지 추궁하기까지 했다.


퇴근하고 그의 다른 약속이나 학교에 가는 일이 있어 그냥 집으로 들어가는 날은 감옥에 끌려가는 것처럼 싫었다. 나를 안쓰럽게 생각해 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었고, 그와 함께 있으면 내 삶이 연분홍빛으로 변할 수도 있겠다는 착각 아닌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내 몸의 변화가 찾아오자 그도 겁이 났는지 확실한 거냐며 나에게 물어왔다. 생리를 하지 않은지 3개월 정도가 지날 때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알지 못했던 나는 잘 모르겠다며 평소 워낙 불규칙해서 그런 거 같다며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하지만 혼자 집에 있는 날은 두려웠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 옛날에는 어떤 정보를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고, 병원은 겁이 나서 절대 찾아가지 못했다. 주저하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그도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여러 날을 걱정했고 급기야 우리 집에 결혼하게 해달라고 이야기를 하겠다며 몸의 이상은 아직 밝히지 않기로 서로 말을 맞추기로 했다. 그렇게 그가 우리 집에 찾아왔고 엄마에게 이야기를 좀 나누자고 했다. 엄마는 그와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왔다. 그리고 물었다. 왜 갑자기 결혼을 하자고 하는 거냐고 물었고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냐고도. 난 아무 일도 없고 그냥 결혼이 하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만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엄마는 완강했고 결혼 같은 소리는 하지도 말고 집에 돈을 더 벌어와야 한다고 이야기했으며, 그가 찾아와 결혼 이야기를 꺼내게 만든 내가 처신을 잘못한 것이라며 기분이 나쁘다고 했다. 그의 행동이 어떠했는지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없었지만 엄마의 무엇인가를 건드렸는지 분노하며 스스로 조절이 되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는 나를 무참하게 매질하기 시작했다. 키워놨더니 은혜도 모르고 돈도 없어 보이는 남자한테 시집을 가겠다고 한다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든 분노는 나를 향했고, 그에게 전화가 왔지만 바꿔주지 않고 또 매질을 해댔다.
그때 혹독하게 매를 맞고 있는 나를 보고 여동생이 말했다.
“왜 그렇게 그냥 맞고만 있어? 그냥 짐 챙겨서 나가. 제발 그냥 도망쳐 언니.”

그 말을 듣고도 난 무서웠다. 이대로 나간다면 내가 잘 살 수 있을지. 혹시 그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또 엄마는 그의 직장에 찾아가서 망신을 줄텐데 그렇더라도 그가 나를 끝까지 지켜줄지. 아무런 확신도 없었다. 동생의 말을 듣고 엄마가 잠시 방을 나가있는 아주 잠시동안 수만 가지 생각을 했지만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한동안 외출금지를 당하게 되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었다. 내 두려움의 시간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아이는 쑥쑥 자라 조금씩 티가 나기 시작했다. 첫아이여서 그랬을까. 7개월이 지나서야 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손을 잡고 병원엘 갔다. 소변검사를 하고 배 초음파를 했다. 아이를 만나게 될 예정일은 3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엄마 몰래 손에 쥔 아기수첩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기대보다는 두려움으로 피가 말랐다.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고, 엄마가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겁만 났다. 그러던 어느 날 급기야 엄마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엄마가 알아챈 게 아니라 안채에 살고 있는 아주머니가 내가 수돗가에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전했고, 그렇게 알게 된 엄마는 당장 병원엘 가자고 했다. 아이는 지우면 된다고. 세상 창피하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3개월 전에 분명 아무 일도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이미 7개월이 넘어 병원 가도 소용없다며 아기수첩을 꺼내놓았다. 수첩을 보며 망연자실해하는 엄마를 보고 난 오히려 통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늦게 알려져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만일 3개월 전 그가 이야기를 꺼냈을 때 알게 되었더라면 아기는 세상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에 뱃속 아이가 나를 살려주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 순간 아이가 이 지옥으로부터 나를 벗어나게 해주는 귀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나는 딸을 낳았다. 그리고 3개월 후 딸아이가 백일이 지나자 결혼식을 올렸다. 지옥을 벗어나게 해 준 딸아이를 갖게 해 준 그가 나를 살게 해 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결혼식을 올리는 과정과 올린 후 가장으로서의 그의 모습을 마주하며 서서히 알게 되었다.

그 길고 긴 과정은 내가 준비 없이 어설픈 엄마가 되는 과정으로의 의미가 더 컸다는 것을. 엄마가 되려고 했던 욕심으로 이루어진 시간은 아니었지만 나의 엄마에게로부터 받고 싶었던 그 사랑을 이젠 나의 딸에게 전해주기 위해 살아가게 된 것이 무척이나 행복했고 고마웠다. 잘 살기 위해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다짐하며 딸아이를 꼬옥 안았다.





내게 행복을 전해주었던 귀한 딸은 아직 나와 함께 산다. 우리 단둘이 지내는 시간은 친구 같은 모녀지간으로 서로의 삶을 응원하며 살아가고 있다. 며칠 전 퇴근길에 매운 새우깡이 너무 먹고 싶어 사들고 들어갔는데 딸이 깜짝 놀란다. 그리고는 이미 먹고 있는 과자 봉지를 들어 보인다. 제대로 통한 날이었다. 우리는 깔깔 웃으며 추가로 사들고 간 맛동산 과자를 새우깡이랑 함께 먹으며 ‘단짠’의 맛에 푹 빠진다.


삶을 살아간다는 자체가 늘 새롭고 예측불가하기에 중심만 제대로 잡고 살아간다면 조금 어설프더라도 괜찮다는 것을 이제 조금 알게 되었다. 내가 살아왔던 삶처럼 준비 없이, 대책 없이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스스로에게 집중하며 살아가는 딸아이를 믿고 응원하며, 내 삶도 중심을 단단히 잡고 살아가니 우리는 이렇게 조금 어설퍼도 괜찮겠다. 난 여전히 어설픈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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