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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올뺌씨 Apr 06. 2022

여자친구의 이별통보에 나홀로 여행을 결심했다

무계획 무대책 도쿄여행기 1


“지쳤어 이제 진짜로 헤어지자”


스마트폰도 없던 시기였다. 투박한 피쳐폰에 날아든 여자 친구의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순간 멍해졌다.


아니! 같이 놀러 가기로 해서 휴가까지 써놨는데 하필이면 이때? 


내 여자 친구는 헤어지자는 말을 정말 자주 했다. 많을 때는 한 달에 2-3번 비교적 평온하다 생각됐을 때도 한 달에 한 번은 빠짐없이 헤어지자는 말을 내뱉었던 것 같다.


연애 초기에는 헤어지자는 말을 들을 때마다 불안하고, 가슴 아픈 나날들을 보냈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얘는 화가 나거나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때 헤어지자는 말을 뱉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게 버릇인 것 마냥 내뱉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란 것쯤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좋아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녀가 날 좋아하는 건 확실했다. 다만 그녀의 헤어짐 병은 그냥 짜증 나는 현실에서의 화풀이였으며, 나에게 부리는 투정일 가능성이 컸다. 요즘 말로 그녀는 한창 스트레스받을 취업준비생이었으니까.


그렇게 2년을 만났더니 이제 헤어지자는 말을 들어도 무덤덤해질 지경에 이르렀다.


연애 초기에는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을 때 친구 녀석을 앉혀두고 어떡하냐며 소주를 병나발 불고 울어재끼며 업혀온 흑역사가 있었다. 나의 흑역사였다.


집 근처 편의점에서 친구 녀석이 속 풀고 들어가라며 뜨끈한 미역국을 데워왔는데 국에다가 머리카락을 매생이처럼 처박고 흐느적거렸다고 한다. 물론 나는 기억나지 않는 일이었다.


하아……, 이런저런 감상은 접어두기로 하자 어찌 됐든 오늘부터 휴가였다. 아니 정확히는 모레부터라고 보는 게 맞겠다. 토요일 일요일은 공휴일이니 휴가에 포함되지 않으니까.


뭐할까? 


뭘 하면 좋을까?


가만히 가마니처럼 방에 짱박혀 있었다.



……



.


시간만 흘러갔다. 


대체 왜!! 휴가 때  같이 나들이 가기로 해놨으면서 왜 하필 지금인가!!!


막상 방구석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려니 짜증만 치솟았다.


막상 시간이 생겼는데 혼자서 할만한 게 없었다.


한참 재밌게 하던 게임도 이제 질려서 손도 안 댄 지 몇 개월 됐고 


뭘 하면서 이 불안하고 초조한 시간을 보내면 좋을까를 고민해 보았다.


드르르르륵


책상에 올려둔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혹시 그녀인가? 하는 마음으로 휴대폰을 확인하는데 이런 젠장 광고 문자다.


‘XX파크 여행 항공 특가 어쩌고저쩌고……’


평소처럼 핸드폰을 그냥 닫아버리려는데 항공 특가라는 말이 왠지 모르게 눈에 확 들어왔다.


엄밀히 말하자면 특가 가격은 아니었다.


그냥 항공, 여행이라는 단어가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20대 초반에는 배낭여행을 해보자고 시도하다가 군대 문제가 해결이 안 돼서 한번 좌절된 적이 있었다. 


군 제대 이후에는 일을 시작하면서 서서히 빛바랜 꿈처럼 잊혀져 갔었다.


그래! 이거다. 여행!


바로 컴퓨터를 켜고 항공권을 검색했다.


외국어도 못하는 내가 처음부터 먼 나라로 무대책으로 떠나기는 그러니까 10대 때 가보고 싶어 했던 가까운 일본부터 가보자고 생각해서 일본 비행기 티켓을 검색했다.


제주도 갈 돈에서 몇만 원만 더 얹으면 해외여행도 갈 수 있다더니 맞는 말이었다. 왕복 티켓 가격이 20만 원 정도밖에 안 하는 게 매우 저렴하게 느껴졌다. 


좋다. 나는 간다. 


여자 친구여! 나를 찾지 말아라.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꺼낸 것은 분명히 그녀가 먼저다. 이런 뫼비우스의 띠 같은 연애를 바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일주일간, 내가 연락할 수 도 없고 연락도 안 되는 제약사항을 스스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비행기 티켓 예매하는 게 무슨 고속버스 예매하는 것보다 더 쉽다. 가격과 날짜 보고 바로 결제만 바로 하면 된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던가, 예전의 나라면 그녀의 연락이 언제 올지 몰라서 기다리느라 밍기적 댔을 테지만 바로 다음날 아침 출발하는 이른 비행기를 예매해버렸다.


출발과 도착 비행기를 알아보고 예약까지 끝 마치고 나니 시간은 오후 4시.


바로 다음날 아침 비행기로 출발해야 해서 짐을 챙기려고 보는데 그 흔한 여행가방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여행을 다녀 봤어야지……



바로 동네 시장에 나가서 저렴하게 막 쓸만한 캐리어 하나를 사 왔다. 집에 들어와서 뭐 빼먹은 게 없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뭐를 빼먹은 거지?


……


아, 생각해보니 아직 잘 곳도 알아보지 않았구나.


하마터면 도쿄 골목길에서 골판지 깔고 잘 뻔했구나.


그나저나 어디서 자야 하는 거지?



......


이렇게 아무런 계획 없이 떠나게 된 것이 나의 첫 여행이었다.


처음 가는 해외인지라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동시에 설레는 기분도 들었다.


마치 그녀와 만나 처음 손을 잡고 연애하던 2년 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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